게임의 테마가 주는 몰입감에 대하여

켠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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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7 오전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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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주의) 어제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서 보드게임을 하러 갔습니다. 사실 어제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작정하고 일찍 퇴근할 생각이었고, 그래서 미리 모임의 친구들에게 게임할 사람 모이자고 이야기를 해 놓았죠. 처음엔 4명이 참석 투표를 했길래 조촐하게 한 파티로 전략 두 게임을 돌려야겠다! 생각하고 뭘 하자고 할까 고민했습니다. 하고 싶은 게임은 너무 많지만 버밍엄, 랭커셔, 콘코디아, 아나크로니, 르아브르 정도로 혼자 추려본 다음, 동생들에게 이 중에서 고르라고 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혼자 설레발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임 시간이 닥쳐올수록 한 명 한 명 투표자가 늘더니 모임엔 최종적으로 7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원래 세상 제일 못할 짓이 친구들은 보드게임 한다는데 나만 못하는 거잖아요. 제가 자주 그래 봐서 압니다 ㅠㅠ 6시 정각에 딱 맞추어 홍대의 자주 가는 보드게임카페에 도착했는데, 역시 참석 인원이 많다 보니 7명 전원이 게임 대기 상태가 될 때까지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다 모일 동안은 처음 해보는 파티 게임 몇 가지를 배우고, 간단한 추상전략 게임도 하나 배우고 했죠. 그렇게 이젠 전략 게임 하나를 할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4명 3명으로 찢어져 게임을 돌리려는데, 3명은 그웨트를 하기로 했고, 남은 네 명끼리 버밍엄을 할까 랭커셔를 할까 고민하다가, 멤버 구성이 뭔가 저 빼고는 셋 다 너무 동생 동생 푸릇 푸릇 한 친구들이어서, 그래 이런 우윳빛깔 동생들과 함께 석탄 그을음 냄새 맡으며 얼굴에 검댕 묻혀가며 게임을 하긴 좀 그렇지. 오늘은 그럼 네타 탄카를 하자! 하고 결정했습니다.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게임이라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네타 탄카는 미들웨이트 수준의 아주 깔끔한 일꾼놓기 게임입니다. 저는 지난달에 보라 중고게시판을 통해 구매를 해서 딱 한 번 돌려봤었어요. 저 말고는 다들 초플이었습니다. 머리 쓰기를 대단히 요구하는 게임도 아니고, 엄청 기발한 시스템이 있는 게임도 아니지만 제가 이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테마가 주는 몰입감 때문입니다. 여러 부족들 모두를 아우르는 최고의 부족장-네타 탄카가 이제 곧 세상을 뜰 것 같아서, 각 부족의 젊은 소부족장들이 네타 탄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서로의 지혜를 겨룬다는 테마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테마가 특이한 거도 아닌데, 이 테마에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너무 잘 어우러져 있어요. 사냥으로 가죽과 고기를 얻고, 숲에서 나무와 버섯을 얻고, 부족원이 지낼 텐트를 나무와 가죽으로 짓고, 먹일 요리를 고기와 버섯으로 하고, 옷은 가죽으로, 북은 가죽과 나무로, 토템은 나무와 동물뼈로 만드는 식입니다. 자원을 얻고 사용하고 만들어야 하는 게 다 설득력이 있어요. 그리고 내 일꾼의 행동으로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경우 관용 점수라는 걸 얻게 됩니다. 관용을 베풀다 할 때 그 관용이 맞습니다. 내가 자원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공용 자원칸을 채워야 하는데, 이럴 때 관용 점수를 받게 되죠. 매 라운드 바뀌는 액션 칸은 배를 타고 다른 마을로 이동을 떠나 액션을 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고, 네타 탄카에게 선물을 바치고 도움을 구할 때는 자원이 소모되지만 다른 액션보다 효과가 훨씬 좋습니다. 산 속의 신에게 기도하러 갈 때도 마찬가지구요. 이런 식으로 액션 하나 하나, 점수화 루트 하나 하나가 다 부족장들 간의 선의의 경쟁이라는 테마에 아주 잘 맞아 떨어져요. 더불어 테마 몰입감을 대폭 높여주는 게 이 게임의 컴포넌트와 아트웍입니다. 아트웍이 너무 예뻐요! 전체적으로 약간 젤다 야숨 느낌이 나면서, 심지어 박스 디자인까지 어마어마하게 수려합니다. 그리고 킥스 딜럭스 버전으로 하다 보니 컴포넌트 퀄리티가 정말 엄청나거든요. 미플 하나, 선마커 하나까지 몰입감을 엄청 살려줍니다. 단점이라 볼 수 있는 부분도 많이 있을 거에요. 너무 점수가 잘 나는 테크가 있기도 하고, 머리를 엄청 써야 하는 수준의 전략 게임도 아니고, 웨이트에 비해 세팅이 번거로운 편이기도 하고, 딜럭스 판이다 보니 가격이 비싸기도 합니다. 테마에 대한 몰입 없이 한다면 너무 평범한 게임일 거 같아요. 그래서 테마에 얼마나 집중하냐, 테마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 게임이냐가 제겐 엄청 중요한 요소인 거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게임을 설명할 때면 테마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많이 해주려고 하는 편이에요. 요즘 평이 많이 엇갈리는 이스케이프 플랜도 테마에 몰입을 하냐 안 하냐에 따라 느끼는 재미가 극과 극일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아나크로니 같은 갓게임은 테마 몰입하면 갓갓갓이 되긴 하지만 테마 몰입을 안 해도 그냥 게임성 자체가 깡패… 게임을 할 때 룰만 달달 익히는 분들도 있을 거고 굳이 배경까지 알아야 돼? 하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게임의 테마에 관심을 가져보시는 걸 권해 봅니다. 그웨트만 해도, 내가 카우보이가 되어서 재난들을 피해 소를 몰아 기차역까지 간다고 생각하고 하면 훨씬 재미있더라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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