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이 취미라고 밝히는 것에 대하여

켠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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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0 오후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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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주의) 머글이란 말은 다들 아시다시피 해리포터에서 마법사가 아닌 인간을 말하죠. 보드게임 모임에 들어와서 얼마 되지 않아 비보드게이머를 별 다른 생각 없이 머글이라고 표현했더니, 딱히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는 머글이란 단어를 이런 방식으로 활용하진 않는 것 같더라구요. 아이돌 팬덤이나 뮤지컬 팬덤 같은 데에서는 ‘진성 매니아, 코어 팬층’의 반대말로 머글이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전 뮤지컬을 좀 좋아했었다 보니 무심코 쓴 말이었습니다. 제가 보드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6개월 전부터였습니다. 즉 6개월 전까지만 해도 전 머글이었고, 34년을 머글로 살아왔었던 거죠. 해리포터가 11살이 되기 전까지 머글로 살아왔던 것처럼… 이랄까. 내 혈통이 마법사였다니, 처럼 내 몸에 보드게임 유전자가 있었다니! 랄까… 물론 지금 랄까 랄까 하는 건 드립입니다. 보드게이머가 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 저의 첫 번째 취미는 확실히 보드게임입니다. 그 이전에 즐기던 취미가 몇 가지 있지만, 지금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네요. 보드게임을 하면서 다른 취미들의 계획들이 다 흐트러졌습니다. 돈, 시간, 에너지 모든 자원이 몰빵 중이에요.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데 말이죠. 수 년 전에, 정확히 얼마나 오래 전인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어쩌다 대학교 후배 하나가 보드게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뭔가 이상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걔 취미가 보드게임이라고? 가끔 젠가나 부루마블 같은 거 한 번씩 하는 거야 모르겠지만, 취미가 보드게임이라니, 너무 유아틱한 거 아닌가, 취미를 보드게임이라고 할 만큼 다른 할 게 없나,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친구인데 취미가 보드게임이라니… 뭔가 좀 이상하고 어색한데,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 그나마 티켓투라이드, 스플렌더 같은 걸 접하면서 아, 젠가나 할리갈리만 하는 게 아니구나, 수 생각 하는 재미가 쏠쏠하네, 라고 느끼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이게 취미로서 즐길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습니다. 취미가 뭐야? 라고 물었을 때 캣카페 가서 고양이 만지기, 동물원 가서 기린 구경하기, 정도의 대답을 듣는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보드게임에 한 발 들이고, 두 발 들이고, 늪처럼 빨려 들어가 잘 때도 귓가에 클레이코인 딸그락 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된 시점에서 생각해보니, 하, 내가 머글일 때 생각했던 그대로 다른 머글들은 날 똑같이 생각할 거 아냐? 내 취미가 나의 사회적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왠지 모르게 들더라구요. 물론 저의 사회적 품위는 하찮습니다... 퇴근 시간에 언제나처럼 눈치 없는 팀장이 켠과장, 오늘 저녁 같이 먹고 갈래요? 라고 물어보는데, 아뇨 죄송한데 제가 선약이 있습니다, 하고서 보드게임을 하러 가는 거도 한 두 번이죠. 몇 번을 그러다 보니 아니 켠과장은 저녁에 뭐 그렇게 약속이 많아요? 어딜 그렇게 가? 라고 물어보시는데 아, 오늘은 제가 이스케이프 플랜 룰마를 해야 해서요, 이게 비딸 아저씨가 만든 최신 보드게임인데 케이퍼 무비를 테마로 한 거거든요, 까진 아니라도 요즘 취미로 보드게임을 하고 있어서 오늘 동호회 모임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기에도 괜히 머쓱하더라구요. 물론 보드라이프 보면 아주 많은 분들이 보드게임을 친구들에게, 회사 동료들에게, 가족들에게 전파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아직 너무 레벨이 낮은가봐요. 겨우 겨우 머글 친구들에게 보드게임 하자 하자 해보자 졸라서 몇 판씩 하고는 있는데, 시작하기 전엔 유치하게 무슨 보드게임이야 술이나 먹어 라는 온갖 멸시를 받게 되고, 그나마 갓레스트레이션이나 스파이폴 같은 게임 할 땐 빵빵 터지지만 스타트업스 정도만 해도 폭망한 경험이 있다 보니 자신감이 엄청 모자라네요 ㅠ 취미로서의 보드게임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이 평가절하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우엔 취미로 보드게임을 한다는 게 취미로 체스를 둔다, 취미로 바둑을 둔다, 적어도 취미로 비디오 게임을 한다, 수준으로는 인식될 텐데 말이죠. 심지어 체스나 바둑도 보드게임인데! 물론 제가 보린이다 보니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회사 앞까지 중고 판매자분께서 와주셔서 촐킨을 받게 되었는데, 이걸 들고 회사로 다시 들어가려니 혼자 괜히 얼마나 머쓱하던지… 회사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괜히 더 꽁꽁 싸매고 들어갔었네요. 다른 부분에서는 남 신경 안 쓰고 잘 사는 편인데, 아직 수련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가 봅니다. 어쨌든 저의 수련과는 별개로, 더 많은 국민들이 보드게임에 대해 많이 많이 정인지하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머글일 때의 저처럼 오해하지 말고, 보드게임이 얼마나 좋은 취미인지 알아주면 참 좋겠네요. 보드게이머가 늘어난다면 물론 더 좋겠구요. 즐거운 금요일입니다. 모두들 보람찬 게임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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