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투쟁을 향한 애정의 리뷰

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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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6 오후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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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나는 왜 철 지난 게임의 이야기를 하는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나는 지금 한창 유행하는,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소위 어그로를 끄는 게임보다는 항상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은 게임을 고찰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경험이 일천해서 그렇다. 과거 보드게임의 기억에 젖어 당시를 떠올리며, 그때 그런 게임이 있었더랬지 라며 기억의 책장을 뒤적여야 겨우 몇 페이지가 떨어지는 정도라서 그렇다. 슬프게도 나에게는 유행하거나, 앞으로 유행할 게임을 할 만한 여력도, 정보도 없다. 가련하다.

그렇다면 하필 이 게임을 왜 지금 와서야 리뷰하는가. 위대한 분들께서 이미 좋은 리뷰를 남겨두었고, 역사와 보드게임을 어떻게 접목하는 것이 좋은지까지 샅샅이 파헤쳐 주었건만, 이제와서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할까.

그럼에도 내가 이 게임을 되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가진 부채의식과 관련이 있다. 수년 간 긱에서 1위를 어쩌고 하며 이 게임의 위대함을 굳이 찾아볼 이유도 없다. 내가 처음 게임에 입문하고 이 게임은 사야겠다고 다짐했던 그때의 그 마음, 처음 박스를 개봉하고 한글화자료를 덧입힐때의 설렘, 드골, 요한바오로2세, 바웬사 등의 역사적 인물들과 한국전쟁, 이란이라크전쟁, 베트남전쟁 등의 참혹한 역사를 카드로 마주하며 느꼈던 감정이 잊히지 않는다. 책으로만 익혔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었다니. 그리고 그걸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니.

내 마음 속 부동의 넘버원은 항상 이 게임이었다. 그래서 감히 이 게임에 대한 글을 적기도 어려웠다. 이 게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게임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 일단 묻어두자.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최근까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게임이라는 자기암시에 빠져있었건만, 몇몇 리뷰를 올리고 한글판의 리뉴얼 소식도 접하면서 문득 이 게임이 다시 떠올랐다.

아, 더 늦기 전에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그 보드게임의 글을 올려야겠다. 말이 길어지더라도, 그것은 이 게임에 대한 나의 주체할 수 없는 애정의 발로임을 조금 양해해주기를 바라며.

0-2. 황투와 함께

대학교때 처음 황혼의 투쟁을 구매했다. 부루마불이나 할리갈리 등을 제외하면 아마 제대로 된 보드게임 중 처음으로 구입했던 게 이 게임이었다. 항상 남의 게임을 빌어 즐기다 이 게임을 사야겠다고 느낀 첫 이유는, 냉전이라는 테마가 꽂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창 국제정치를 배우기도 했었기에 동했던 이유도 있었고, 남들이 잘 가지고 있지않은 게임에 대한 로망도 살짝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보드게임 모임에서 하는 게임은 대개 푸에르토리코를 위시한 유로스타일의 게임들이었다. 그런데 영문 가득하고 복잡해 보이는 GMT의 게임은 나의 몹쓸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꼭 이 게임을 사야 하나 싶었다. 나에게 룰을 알려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을 사기 전에 룰북 먼저 읽어 보았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오로지 룰북만 읽고 천장에 이미지를 그려가며 룰을 익히는 신기를 발휘했다. 이때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대견하다. 지금 이렇게 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게임도 없이 룰 먼저 익히다니.

이후는 망설일 것 없었다. 영문판 게임을 덜컥 지르고 나서 모임에 들고 다녔다. 당연히 해줄리가 없지 않은가. 기본 2인 게임인데 어떻게 모임에서 이 게임을 한다는 말인가. 그래도 꾸준히 들고 다니며 게임을 즐겼다. 하우스룰로 2:2 팀전도 구상해서 즐겨보기도 했다. 한동안은 근처 수많은 카페 중 하나에 자리잡고 친구와 앉아 매주 한두판씩 즐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는 황혼의 투쟁의 전도사였다. 보드게임 이야기만 나오면 황투 해봤냐, 황투 재미있다, 언제 황투 같이 하자. 이 소리를 뻐꾸기처럼 늘어놓았다. 맵과 카드를 외우고, 전략을 읽어보고, 콜렉터스 에디션에 흥분해서 무작정 지르기도 했다. 긱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올 게 왔다며 그럼 그렇지! 이게 옳은 순위지! 라고 기뻐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 게임이 전 세계인에게 인정 받은 것만 같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샀던 그 게임의 보드는 이제 나와 함께 세월을 먹고 있다. 슬리브도 오래되어 눅눅해진지 오래. 이제 중고시장에도 내놓지 못할 이 백발의 게임을, 나는 보물인 양 간직할 것이다. 이 게임에 내 보드게임 인생이 함축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페 창너머를 배경삼아 황투를 즐기다)

1. 황혼의 투쟁

각 플레이어는 소련과 미국 각 두 국가 중 하나를 골라 플레이한다. 정해진 라운드 동안 세계 각지에 영향력을 뿌리고, 특정한 시기(스코어링 카드가 플레이되는 시점)나 특정한 카드로 승점을 얻으며, 각 플레이어는 줄다리기하듯 승점을 밀고 당기게 된다. 한 플레이어가 20점을 달성하면 즉시 게임 종료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최종승점을 계산하고 승자를 가리게 된다.

라운드마다 핸드에 7장 또는 8장을 가지고 플레이하며, 각 라운드마다 한 번의 헤드라인과 5번, 혹은 6번 액션 할 기회를 얻는다. 헤드라인은 카드의 능력을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단계이며, 액션은 카드를 내려놓고 이벤트로 사용할지, 카드에 주어진 포인트를 사용하여 다른 액션을 할 것인지 선택한다.

보통 액션은 영향력을 흩뿌리거나,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재조정을 하게 되는데 카드에 적힌 숫자가 높을 수록 액션에 유리함도 있으나, 그만큼 카드의 능력도 좋기에 카드를 잘 선택해야 한다.

이 게임은 독특한(이제는 독특하지 않은) 카드 드리븐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모든 플레이어는 한 덱에서 카드를 가져와 플레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 진영의 카드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카드도 자연스럽게 들고 올 수 밖에 없다. 내 진영의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카드의 이벤트를 사용할지, 다른 액션을 수행할지 선택할 수 있지만, 상대의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이벤트는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이 게임은 운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카드를 언제 사용해야 나에게 이득이 될지, 그리고 상대에게 해가 될지 파악해야 한다.

(미국 플레이어 핸드에 이렇게 카드가 들어오면 골치가 아파진다)

게임 라운드마다 딱 한번 카드를 사용해서 우주경쟁을 할 수 있는데, 이 행동으로 경쟁에서 앞서나가게 되면 보너스 액션이나 승점을 준다. 우주경쟁의 보너스는 상대 또한 그 위치에 도달하게 되면 중단되니 적당히 상대의 보너스를 보고 따라가는 것도 하나의 플레이 방법이다.

이 게임이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갖는 특이한 룰이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데프콘이다. 세계는 시시각각 핵전쟁의 위협을 받고 있는데, 상대의 도발적 행동(카드 이벤트, 군사작전, 전장지역에서의 쿠데타 등)은 데프콘을 강화하게 된다. 그러다 만일 데프콘 1이 되면 그 순간 이를 초래한 쪽에서 핵전쟁의 책임을 지고 패배하게 된다는 룰이 있다. 이 게임이 아슬아슬하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바로 데프콘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데프콘이 강화되는 이벤트는 대개 나에게 큰 이득을 주는데, 이를 무분별하게 수행하다가는 패배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드 중에는 일명 데프콘자살이라는 함정카드들도 있다. 상대의 카드를 사용할 때에는 무조건 이벤트가 발생하기 때문에, 우주경쟁으로 소모하거나 데프콘을 완화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데프콘 1이 되어 게임에서 허무하게 패배할 수도 있다.

또한 이 게임에서 흥미로운 점은 카드 이벤트로 인하여 게임 내 추가 효과를 받는다든지, 디버프를 받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초반에 강력한 카드가 훗날 어떤 사건으로 더이상 이벤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번 라운드에 상대가 사용할 카드 포인트를 줄이기도 하는 등 꽤나 강력한 효과를 주는 카드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 게임에서 테마와 시스템이 오묘하게 결합된 독특한 존재가 있다. 카드임에도 카드 취급을 못받는 특수국가, 바로 중국이다. 당시 중소관계와 미중관계의 독특함을 지도가 아닌 카드 한장으로 간략하면서도 참신하게 나타내었다. 미소 양국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중국카드를 서로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데, 이 카드가 아시아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중국을 향한 양국의 외교 줄타기를 어떻게 이렇게 나타낼 수 있었을까 하는 감탄이 터진다.

2. 난 이 게임이 좋다

(중기 냉전 시기의 보드판)

모두가 대략 알고 있듯이 황혼의 투쟁은 케네디의 취임 연설문에서 따온 제목이다. 우리나라에서 황혼의 투쟁이라 불리게 된 이유에는 이견이 있었던 걸로 알지만, 개인적으로 제목에 큰 불만은 없다.

이 게임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거대한 세력의 알력다툼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부터 소련 붕괴 이전까지의 시간선으로 그리고 있다. 이 게임의 대단한 점은 그 주요하고 거대한 역사를 어떻게 하나의 게임에 담는가에 대한 고찰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명료하다. 지리적 이점이라든지, 주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표현이라든지 정치적, 경제적 블록화에 대한 분류라든지. 이런 것을 보드에 아주 깔끔하게 도식화 한 것 부터 탁월하다고 느낀다.

물론 지금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영국은 안정도가 5여서 쿠데타의 위협이 없고,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는 안정도가 1밖에 되지 않아 정치체제가 금방이라도 뒤집힐 수 있다는 그 아슬아슬한 속성을 숫자 몇개로 간단히 도식화 했다는 것도 멋진 아이디어이며, 핵전쟁의 아슬아슬한 위기를 데프콘이라는 5개의 숫자로 깔끔하게 만들어낸 역량 또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냉전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우주경쟁 또한 우측 상단의 도식으로 깔끔하게 나타내었다. 이 경쟁이 정말 재미있다고 느낀 점은, 우주경쟁에 보너스가 있긴 하지만, 사실 어찌보면 액션이 더욱 중요할 때가 많다. 이 액션 자체가 자신의 턴을 날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마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당장 상대의 세력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상황에서 우주경쟁을 할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우주경쟁을 수행해야한다. 데프콘 카드를 버리기 위해서라든지, 상대의 추가이점을 막기 위해서라든지. 하지만 우주경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더 큰 포인트를 가진 카드를 버려야 한다.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보드 우측 상단에는 턴 트랙과 우주경쟁 트랙이 나란히 있다)

카드드리븐은 많은 고수분들이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이 게임에 생생한 테마를 입히기에 아주 좋은 시스템이다. 덱은 총 세 개로 나뉘는데, 초기 중기 후기 냉전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사건만 크게 나누어져 있고, 그 안의 이벤트는 모두 섞여서 나누어 갖게 된다. 드골의 집권이나 피델 카스트로의 등장, 한국전쟁과 같은 이벤트가 보드에 그럴싸하게 구현되어 마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듯한 효과를 준다. 나는 카드 쪼가리를 냈을 뿐인데! 정말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이 보드에서 일어난 것 같다니까요?

스코어링의 절묘함도 빼놓을 수 없다. 각 대륙마다 승점이 차등 배분 되어있어 각 국가의 중요도를 당시와 비슷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유럽 주요국은 언제나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공고하다. 후기 냉전으로 갈 수록 동유럽이 무너져간다. 이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미를 놓치지 않다니. 미국이 느끼는 일본의 중요성과 쿠바의 위험성, 소련이 느끼는 아프가니스탄의 애매한 위치, 교황의 껄끄러움, 고립된 이스라엘의 상황과 제3세계의 잦은 쿠데타, 그리고 미소의 제한적 개입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현실성 있게 구현된다.

이 게임은 독특하게도 열전이 아닌 냉전을 테마로 삼았다. 2차 세계대전이나 여타 전쟁과 같은 직접적인 박력은 없을지라도, 냉전이 가지고 있는 차분한 긴장감은 또렷이 유지된 채로 게임이 흘러간다. 지금 이 카드가 나오면 안되는데. 상대는 어떤 행동을 할까. 아, 상대의 핸드를 보고 싶다. 나에게 스파이가 있다면.

(소련의 시선에서 유럽을 바라보다)

3. 불호가 있을리가...!?

안타깝게도 이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맞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대부분은 주사위에 대한 확률의존이 강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 게임에서의 주사위에 대한 애증은 쿠데타에서 가장 크게 나타난다. 쟤 주사위는 6인데, 내 주사위는 1이야! 라는 볼멘 소리가 나올 법 하다. 사실 그렇다. 쿠데타는 카드 이벤트도 아니고 몇가지 액션 중에 하나일 뿐이야 라고 말하기에는, 그 파괴력이 상당히 크다. 가뜩이나 미국 플레이어는 쿠데타를 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더 적은데, 간신히 잡은 기회에서 주사위 1이 나와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손해인가.

그래서 웬만하면 나는 안정도 2인 국가에 액션포인트 4짜리 카드를 사용하는 것으로 쿠데타를 시도하려 한다. 주사위가 1이 나와도 상대의 포인트를 깎을 수는 있으니까. 내 입장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이 정도 지원밖에 없어. 나머지는 너희들이 잘 해봐... 마치 CIA나 KGB 요원이 부추기기만 하는 것 처럼, 직접 개입을 하지 못하는 그들의 심경에 빙의 되듯이.

나는 보드게임 내에서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을 꽤 좋아한다. 비슷한 주제로 글도 썼던 적이 있다. (https://blog.naver.com/youpiostar/221376768860)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카드 포인트 밖에 없으니 나머지는 너희 국가에게 맡길 뿐이라는 심정으로 바라본다면, 그게 크게 극복 못할만한 장애는 아니었다. 물론 정말 1이 나왔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지만.

이 게임은 그 외에도 몇가지 약점이 더 있다. 일단 요즘 유행하는 장르인 유로전략게임과는 결이 다른, 그래서 조금은 낯선 느낌의 게임이라는 것이다. 최근 보드게임의 재미에 불이 붙은 게이머가 있다면,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게임의 시스템에서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심심한데? 내가 아는 보드게임하고는 다른데? 혹은 전략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일견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이 게임에 꽤 오랜 전략이 존재한다는 것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게임을 즐기는 방법론에도 약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게임은 개인보드 안에서 철저히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빌드를 짜는 게임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가? 혹은 내게 주어진 위기를 어떻게 기회로 만드는가 하는 즉각적인 상황판단과 위기관리 능력이 중요하다. 시시각각 내 목표는 허물어진다. 손에 똥 같은 카드가 들어와서 좌절할 수도 있다. 내가 세운 아시아 컨트롤 계획은 상대의 한 수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발버둥쳐가며 상대도 진창에 빠뜨리는 전략을 쓸 수도 있고, 치킨게임으로 누가 컨트롤하는지 보자고 영향력을 쑤셔박는 행위를 할 수도 있다. 도저히 점수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해도, 데프콘 카드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는 방법 또한 있다. 게임을 즐기기로 했다면 최적화된 방법은 나중에 보아도 좋다. 일단은 그 상황을 극복하고, 결국 성취하는 데서 재미를 느껴보자. 그래, 그저 테마를 즐겨보자.

(이 게임이 한글판이라니!)

사실 이렇게 긴 글을 저 만큼이나 늘어놨지만 단점은 또 있다. 이 게임은 2인 전용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보드게임 모임에서는 꺼낼 엄두도 못내는 게임이라는 한계. 그 옛날 가방 속에 잠자고 있던 나의 황투처럼, 쭈뼛거리며 해보고 싶다는 말도 꺼낼 수 없는 그 모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2인 전용 게임은 모임에서 꺼낼 수는 없어도, 영혼의 파트너가 있다면 언제든 꺼낼 수 있다는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가족도, 친구도 좋다. 사람을 애써 모으지 않아도, 나처럼 모임에 나가지 못하는 극 I라도 어찌저찌 친구 하나만 잘 사귀면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기대감. 2인 전용 게임이라는 약점은 그 구하기 어렵다는 인간 컴포넌트가 딱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장점으로 치환될 수도 있다. 2명만 있으면 한 때 보드게임계를 평정했다는 그 게임을 할 수 있다고? 개꿀이네.

하지만 2인의 벽을 넘었다 한들, 황혼의 투쟁을 들이밀어서 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이다. 이 게임의 단점이라면(나는 장점이라 생각하지만) 생소한 냉전테마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상대는 예쁘게 농장짓는 게임 하고 싶은데, 삭막한 세계지도 펼쳐놓고 쿠데타를 일으키라니. 게다가 룰은 뭐가 이렇게 세세한지 국가는 전장, 비전장국가가 있고 중요도는 점수를 어떻게 내는지에 따라 다르고, 이 카드는 어떻게 써야되고, 아! 중국은 카드인데 카드가 아니라 어쩌고 저쩌고. 그래, 그래서 이 게임 얼마나 걸리냐면 넌 처음하니까 한 세시간 반?

처음 하는 사람에게 이 게임을 들이밀기 어려운 이유는 이 게임이 가진 난도와 시간에 비례한다. 보드게이머야 논외로 하더라도, 할리갈리를 즐겨하던 연인에게 감히 이 게임을 들이밀 수 있을까? 그리고 상대 진영에 쿠데타를 날리고 쉽게 기뻐할 수 있을까? 그런 게임을 세시간 동안 해야한다는 반협박에 사랑의 힘으로 한번 쯤은 해줄 수 있어도 또 다시 할 수는 있을까? 차근히 알기 쉽게, 적당히 봐주면서 라는 미덕으로 어떻게든, 무운을 빌며.

마지막으로 이 게임은 10턴까지 플레이할 수 있지만 7할은 10턴 이전에 게임이 종료된다. 상대와의 격차 때문일 수도 있고, 데프콘 카드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여튼 레이트 워(후기 냉전) 카드 보기가 상당히 어려운 게임이다. 그게 장점일 수도 있지만, 게임을 온전히 즐기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게임을 접한 사람들은 대개 알고 있지만 초반에는 소련이, 후반에는 미국이 유리하다고 알려져있다. 그래서 초중반에 일방적으로 소련이 두들겨 패다가 게임이 끝나는 경우도 있다. 실례로 초보자 두 명이 이 게임을 하게 됐는데, 미국 플레이어의 입에서 난 왜 맞기만 해? 라고 하는 말이 들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미국에게 포인트를 더 주는 룰이 있다.

이외에도 레이트워 카드를 위한 후기냉전의 짧은 룰 게임도 있다. 물론 세팅은 좀 더 번거롭지만, 1시간 내외로 황혼의 투쟁을 즐기기 위함이라면 레이트워 룰도 적절한 선택지가 아닐까 싶다.

(레이트 워까지는 갔...다.)

4. 마무리

어렵사리 구했던 황혼의 투쟁,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다. 이 게임이 한글판으로 나올 줄이야. 몇년 전에 처음 소식을 접하고 눈을 의심했다. GMT 게임은 한글 안나오는거 국룰 아니었어?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구나 알고있는 적절한 난이도의 게임이 된 것에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

여태까지 이 글에 그런 뉘앙스를 풍겼듯이, 나에게 보드게임 하나만 남기라면 단연코 황혼의 투쟁을 남기겠다. 이 게임이 시스템적으로 완벽해서, 세기에 한 번 나올만한 재미를 선사해서는 아니다. 그저 내 추억과 함께 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게임에 나의 추억을 녹일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그렇다. 아마 보드게임의 범주에 두지 않더라도, 내 인생에 보드게임이란 카테고리가 삭제된다 해도 황혼의 투쟁이라는 카테고리는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이 게임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내 보드게임 인생을 함께 할만한 볼륨과 재미를 지니고 있었다.

확답은 어렵지만 나의 보드게임 성향 또한 황투로부터 파생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유행하는 유로스타일 전략게임보다는 이상하게 밸런스가 어긋난 듯 하면서도 묘하게 테마가 짙은 게임이 좋다. 그냥 그 시대에, 그 상황으로 잠시 다녀온 듯한 체험이 마냥 즐거워서.

요즘도 간혹 황혼의 투쟁을 펼쳐볼 때가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조용한 방에서 세계지도를 펼치며 아, 그때 그랬지 하며 스토리를 되짚어 볼 수 있어 좋다. 수많은 게이머와 함께 자웅을 겨루었고, 그때마다 지구의 역사가 하나씩 재창조 된 듯한 느낌, 그리고 나는 그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다.

가끔 다른 보드게이머에게 황투를 권할 때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또 황투를 권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게 황투는 관념적으로 알려진 보드게임이 아닌, 체스나 장기같은 포지션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도 왠지 탑골공원에 황투를 펼쳐둘 것만 같다. 주위의 호기심 찬 동지들에게 장기 비슷한 게임인데 재미있다며, 룰은 알려줄테니 같이 해보지 않을래? 라고 물을만한 게임. 그 중 누군가는 나를 황투 빌런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투 진짜 재미있다고, 한 번쯤은 꼭 해보라고 권하고, 또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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