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23] 어렸을 때 매달 PC게임 잡지를 사다보곤 했습니다.

에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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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1 오전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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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때 매월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게임잡지 발매일이었습니다. 그날이 되면 7000원을 손에 꼭 쥐고 아침 등교길에 문방구에 들려서 잡지를 산 다음에 자랑이라도하듯 쉬는시간마다 앉아서 혼자 쓸모없는 내용까지 꼼꼼하게 다 읽으면서 다 읽기 전에는 반 친구들에게도 절대 안 빌려줬었죠(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때도 참 못된 녀석이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사지도 않은 게임의 공략까지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마 거금 7000원이나 주고 내가 소유를 했으니 그만큼 충분히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PC게임 잡지는 모두 폐간되고 웹진과 커뮤니티가 그 기능을 대체했죠.

그 이후에도 좋아하는 게임이 있으면 해당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활동은 열심히 안하더라도 글들은 꼬박꼬박 챙겨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나와서 심심하던 차에 아내랑 본격적으로 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연구하면서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이던 시기에 팟캐스트 보톡스를 들으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좀 더 깊은 보드게임의 세계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보톡스와 성취감에는 고마움의 표시로 팟빵에 몇 번 작은 액수를 기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보드게임 팟캐스트들은 저한테는 어렸을 때 사던 게임잡지 같은 존재들이거든요.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면서 이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는 느낌도 들고 다양한 정보를 얻기도하구요. 팟캐스트가 어릴적 사보던 게임잡지에 비해서 편집과 인쇄 과정이 빠졌을뿐 컨텐츠면에서는 크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게임이나 디자이너에 대한 소개뿐만 아니라 패널들끼리 웃고 떠드는 수다방송까지도 저한테는 무척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 컨텐츠였거든요. 인터넷에 없던 시절에는 돈내고 즐기던 것들을 공짜로 즐기자니 컨텐츠 제작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 후 졸업도 하고 아직 계약직이긴 하지만 이제 내 손으로 돈도 벌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최근에 미국사를 간단하게 훑어볼 겸 유튜브에서 Crash course라는 걸 듣고 있는데 짧지만 요약이 잘되어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고 있다면서 내년부터 여기에다가 기부를 좀 하고 싶다고요. 공짜로 이 정도 양질의 컨텐츠를 즐기는건 양심에 찔린다는군요. 이제 부모님한테 돈 타 쓰는 처지가 아니니 우리 돈으로 우리가 뭘하던 마음대로니까 원하는만큼 기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떠오른게, 최근에 들어갔던 위키피디아하고 보드게임긱에도 기부 안내 멘트가 떠 있더라구요. 집단 지성을 옳은 방향으로 이용해서 백과사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최신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는 이미 인터넷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거의 없으면 안 될 존재입니다. 보드게임 덕후들에게 보드게임긱이 없는 보드게임 생활은 상상하기 힘들죠. 사실 아내가 Crash course를 이용하는 것보다 내가 보드게임긱을 이용하는 횟수가 훨씬 많을텐데, 나도 긱에 고마움의 표시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기부를 했습니다. 덤으로 긱뱃지와 긱 골드도 받았네요(그런데 긱 골드는 어디다 쓰는건가요?). 위키피디아에도 작은 액수지만 기부를 좀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보드라이프는 보톡스를 들으면서 처음 알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초창기에 펀딩을 했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쉽게 그 당시에는 보드라이프를 몰라서 펀딩에 참여를 하진 못했네요. 보드라이프는 저에게 위의 팟캐스트들 이상으로 예전의 게임잡지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양한 리뷰, 후기들과 여러 사람들의 잡담, 예쁘고 재밌는 사진들이 올라오는 갤러리와 모르는 룰이 있으면 알려주는 Q&A, 유저들이 직접 올리는 양질의 자료들, 다양한 게임 추천글과 게임 시상식 분위기의 각종 연말 Top 100 리스트들은 예전에 돈 주고 보던 게임잡지들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가끔 일어나는 격렬한 불판글들도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즐기고 있습니다. 원래 옛적부터 싸움구경과 불구경이 제일 재밌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현재 보드라이프에서 이 모든것을 공짜로 즐기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유저들에게 보드라이프는 강한 뽐뿌의 장이니 큰 출혈들이 있으시겠지만 아쉽게도 그 돈이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분들에게 돌아가진 않죠.) 물론 커뮤니티 출입이 유료가 되면 이용객이 급감할테니 그런 방법은 쓸 수 없겠지만 최소한 보드게임긱처럼 1년에 한 번이라도 기부하는 기간을 가져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논의도 여러번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제안을 했었죠. 그런데 가끔 자료만 찾으러 들어가는 보드게임긱에 기부를 하면서 거의 보드게임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들어와 있는 보드라이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다는게 안타까워서 글을 한 번 올려봅니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로 아날로그 시절에는 돈을 내고 구입하던 컨텐츠들 상당수가 음으로 양으로 공짜로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설책이나 잡지들은 웹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됐고, 영화관에 가서 돈 주고 보던 영화들을 인터넷으로 거의 공짜로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의 경우도 테이프나 시디를 사야했던 시절에서 온라인으로 거의 공짜로 접할 수 있는 시대로 변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한 컨텐츠가 매우 작은 돈이나 공짜로 공급되는게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양질의 컨텐츠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저해하는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질 좋은 컨텐츠는 어디선가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보드라이프도 수익 걱정 없이 운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래봅니다. 불법복제가 판치는 다른 문화 장르와는 달리 아날로그의 끝을 달리는 보드게임은 (중국을 제외하고는) 불법복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정품구매에 익숙한 보라 여러분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보드라이프라는 플랫폼에 정당한 지불을 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소망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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