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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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7 10:05

“저는 보드게임을 취미로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지 약 15년이 지났네요. 얼마전에 보드게임긱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배지를 하나 준다고 하네요. 소장게임 1,000개 달성 기념으로...

이제 겨우 15년차 뉴비가 열심히 모아서 간신히 받게 된 배지인지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오래전에 이걸 돌파하신 선배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데, 이 분들도 이런 심정이셨을까요? 이 분들은 주변에 뿌린 게임들만도 1,000개는 거뜬히 돌파하셨을테니, 제가 감히 그 분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 손오공에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과 다를 바 없겠군요.

어쨌거나 선배들의 이끌림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원망과 감사를 동시에 보냅니다. 으하하~

15년 정도 게임을 하다보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많은 사람들과 마주해봤습니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아직 보드게임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자칭, 타칭으로 보드게임 전파사~~(순돌 아빠?)~~를 자처하다보니, 꽤 많은 실패사례들이 쌓여있습니다. 개중에는 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드게이머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지만, 저의 실패사례가 나쁜 기억으로 자리잡아서, 보드게임과 인연을 맺지 못하게 된 경우가 더 많지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좀 더 노련한 게이머를, 아니 최소한 10년차는 경과한 저를 만났더라도 그들은 보드게이머가 될 수 있었을테니까요.

Non-gamer를 Gamer로 이끄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게이머들의 오랜 숙제같은 것일테지요. 2000년대 초에 보드게임 카페들이 직면했던 문제들도 이것일 겁니다. 아직 보드게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호기심만으로 카페 문들을 열고 들어선 손님들을, 어떻게 하면 ~~카페 죽돌이~~ 호구 단골 손님으로 만들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업계 생존과 직결된 문제일테니까요.

그 결과 상당수 카페들이 선택한 것이 소위 삼신기입니다. 젠가, 할리갈리, 텀블링 몽키스.

이들 게임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 당장 꺼내도 아드레날린이 분수처럼 쏟아지는 손떨림 게임이지요. 하지만, 이들 게임은 당장의 Boom-up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보드게임으로 진입시키는 것에는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치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에 도착한 후에, 더이상 힘들여서 인도로 갈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콜롬버스처럼, 그 뒤에 펼쳐진 보드게임 대륙이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조차 못할텐데 말이죠.

그래서 초기의 보드게임 붐이 꺼진 후로, 꽤나 오랜 시간 보드게임 카페는 침체기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누적된 실패 사례로 나름 제가 찾아낸 진입게임(?)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규칙은 가능한 단순해야 한다.
게임의 속도가 빠를 수록 좋다.
너무 쉽게 이길 수 있어서는 안된다.
적당한 운의 요소가 담겨있어야 한다.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갈증을 남기는 게임이어야 한다.

규칙 설명이 5분을 넘기면 벌써 지루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은 가능한 빨리 손에 주사위든 미플이든 들려드려야 합니다.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자기 턴이 돌아오는게 너무 늦어도 곤란합니다. 자기 차례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본인의 핸드폰을 꺼내기 시작하면, 이미 망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별다른 투쟁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게임도 안 좋습니다. 누가 이기든 너무 쉽게 이긴다는 느낌을 주면 안된다는 것이죠.

게임에 운이라는 요소가 너무 많아도 문제지만, 너무 적어도 또한 문제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이상한 중독(?)의 위험이 있고, 후자는 진입게임으로서의 부적절합니다. 숙련자와 승부를 겨룰 수 없을테니까요.

이해는 쉽지만, 이기기는 쉽지 않은, 적절한 운이 버무려진, 쾌속 진행 게임. 여기에 게이머에게도, 접대용 게임이 아닌 함께 즐기는 게임이라면 금상첨화겠지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게임들이 있습니다.

올 여름 폭염을 피해 여행을 가면서, 많은 게이머들이 보드게임도 한 보따리씩 싸들고 갔을 겁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간 여행에 십수개의 게임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여행 기간동안 돌아가는 게임은 몇 개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지요.

그런데 Non-gamer의 전형이신 부모님께 간택받는 행운을 누리는 매우 드문 게임이 등장했습니다. 그냥 간택받는 것도 아니고, “한 판 더!”를 몇 번이나 외치셨으니 놀랄 일이지요. 나중에 부모님이 따로 여행을 가신다고 하시면서, 그 게임들을 가져가고 싶으니 빌려달라고 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15년 넘는 보드게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 게임이 모두 한 회사의 제품입니다.

이 회사의 라인업에 대해서는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한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게는 꿈의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 회사가 뭔가 신제품을 발매하면 이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덮어놓고 구매를 하고 있습니다. 진입게임으로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저 역시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니까요.

이 회사가 이번에는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텀블벅에 한 게임을 올려놓더군요. 소문이라도 잘 내주든가, 텔레그램으로 사람들이 귀뜸해주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칠뻔 했네요.

빌라 봉!

게임 제목을 보는 순간, 무릎을 쳤습니다. ‘또 한 건 했구나!’

이 회사가 일전에 출시한 [마헤]가 윷놀이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취향을 저격한 게임이라면, 빌라 봉은, 마헤의 열기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테이블에 곧바로 뒤이어 펼쳐놓기 좋은 게임입니다. 마치 호타준족의 선두타자가 안타로 출루한 상황에, 거포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 꼴이지요. 타율이 한 7~8할은 될 듯한 타자가 말이죠.

[마헤]가 윷놀이를 대체한다면, [빌라 봉]은 뭐랄까... 고스톱을 대체한다고 할까요. 나의 다음 수에 대한 설계와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가 깔아주는 카드들를, 방바닥이 꺼질 듯 내려치며 수거하는 고스톱처럼, 상대의 캥거루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화다닥 달려주는, 그러면서도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 캥거루들을 재빨리 수거하는 쾌감이 있습니다.

이런 사악한 쾌감을, 캥거루라는 귀여움으로 포장을 해두었으니...

이 회사의 라인업에는 숨은 보석들이 꽤나 많습니다. 특히 알렉스 랜돌프의 게임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절판, 품귀 현상을 겪고 있는 게임들을, 한국의 대형마트에서 한글판으로 발견할 때의 기분이란... 참 말로 형용하기 어렵군요.

첩보에 따르면, 이 회사가 곧 [큰 거 한 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코그니토]에 비견할만한 4인 전용 게임을 말이죠. 그러고보니 두 게임 모두 알렉스 랜돌프의 게임이군요!

1번 타자 [마헤], 2번 타자 [빌라 봉]…

환상적인 라인업을 구축해가는 이 회사에게 한 가지만 좀 당부하고 싶네요.

소문 좀 내시라! 출시한 줄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고요!

p.s. 어쩌다 보니 단상으로 시작해서 홍보글로 끝났네요. 저는 이 회사와 무관합니다. 고용관계도, 계약관계도, 협찬도 받은 바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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