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한 고등학교 보드게임 동아리 지도교사의 이야기

개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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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3 오후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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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교육과 게임 사이의 간극
2022년 현재, 대한민국 고3은 가히 전쟁터입니다.

수능이라는 일회성 시험으로 인해 아이들의 12년간의 노력을 평가한다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들과 지방과 서울의 교육불균형에 대한 지적들은 수시전형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수시전형조차 신뢰성을 의심받게 되며 교과전형이니, 학생부종합전형이니 하는 수많은 입학전형들이 등장하고 그러한 전형들도 년 단위로 바뀌는, 그야말로 입시 춘추전국의 시대가 2022년 가을이죠.

이러한 현재, 제가 사는 지역의 아이들이 수능준비를 할 수 있는 환경이냐 묻는다면...솔직히 고개를 가로저을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교육인프라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아이들이 어디에 눈을 돌리게 되느냐, 바로 [수능을 안보고 대학을 갈 수 있는 전형]입니다. 특히 수능 뿐 아니라 [공부] 자체 비중을 줄이고 [활동]에 집중하는 전형인 [수시, 그 중에서도 학생부종합전형]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게되죠.

어찌보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넓어진거 아니냐고 물어보실 수 있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보면 사실 아이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더 커요. 저 말은 학교생활의 모든 순간이 대학 입시에 활용될 수 있다는 말이 되거든요. 다시 말해 학교생활에 여유가 없어진다는 얘기가 됩니다. 쉴 틈 없이 생기부를 채워넣어야 하거든요. 따라서 학생부 종합전형을 통한 대입을 시야에 둔 학생이라면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대학 입시에 활용할 수 있는 무엇]을 하느냐에 집중하고, 그런 활동을 찾아 헤매이게 됩니다. 선생님들도 아이들의 생기부가 내실있게 기록되어야 하니 단순한 강의식 수업은 각광받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직접 조사하고 발표하는 활동을 해야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거든요. 이 부분이야 각 교사의 스타일에 따라 반영하는 방법이 다르긴 하겠지만요. 아무튼 이러한 정규 교과시간 내 활동을 제외한다면 활동으로 기재할 수 있는건 창의적체험활동, 즉 동아리 정도 밖에는 없어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동아리들 역시 [입시에 도움이 되는 동아리]로 한정되는 수순을 밟죠.

네. 학교 입장에서는 "수학화 과정을 통한 현실문제에 대한 고찰과 그 해결방법의 탐구" 를 "보드게임부"보다 반기게 되는 것이 당연한거에요. 그리고 이것이 학교 현장에서 게임을 대놓고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물론 적잖은 학교들이 e스포츠의 가치를 알고, 아이들의 니즈에 맞춰 교내 e스포츠 대회를 연다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씩 경계를 낮추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저는 동아리 총괄 부장님께 "저 1년동안 동아리로 보드게임부 해두 대여? 헤헤 :P" 할 자신은 없어요. 결국 눈치보면서 "수학 도서 평론회" 같은걸 열게 되는게 보통이죠.

1. 저는 지금...
그러한 시점에, 대학 진학이 아니라 직업사회로의 빠른 진입을 목표로 하는 특성화학교는 이런 구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제출받아서 이 친구가 무슨 동아리를 했는지 확인해보는 직장은 잘 없으니까요. 물론 아예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으니 당연히 완전히 방치일리는 없구요, 아이들이 전공과 관련된 직장에 입사할 때를 대비하여 전공 관련 동아리의 경우 전공 선생님들께서 꽉 잡아주고 계십니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특성화학교에서 중요성이 덜한 저 같은 인문과목 선생님들의 숨통은 인문계 학교와 비교하면 선택지의 폭이 넓어져요.

더군다나 전에도 언급했지만 저희는 지도교사가 많은 편이라서 동아리당 인원수가 적기도 하고 굳이 제가 교과 관련 동아리를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상황이에요. 실제로 많은 선생님들께서 프라모델 조립부 등의 취미활동 부서를 운영하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작년과 올해 2년에 거쳐 학교에서 시작은 조심스럽게, 이제는 당당하게 "보드게임부" 라는 간판을 내걸고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올해는 도전적인 운영을 해 보았는데요, 간단하지만 포스터도 제작하여 각 학급에 게시하고 오는 녀석들을 다 받는 것이 아니라 일단 명단만 취합한 후 추후 간략히 면접을 통해 어느정도 게임에 감각이 있고, 보드게임에 익숙한 녀석들을 4인 단위로 두 그룹, 즉 8명만 모아봤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는 동아리 시간 외에도 늦게가거나, 주말에 부르거나, 방학 때 부를 수 있음을 미리 주지시켜 정규 동아리 시간만으로는 부족한 플레이타임을 보충하리라는 플랜까지 빠방하게 세웠습죠.

주말에도 동아리 보충활동을 한다고? 이렇게까지 동아리에 진심인 선생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 문체부장관님, 교육부장관님 드루오세요. 제 책장 한구석에 표창장 한 두개 정도는 들어갈 공간이 언제나 준비되어있다구요.

2. 보드게임 동아리요? 이것 세 개만 기억해주세요
사실 보드게임 동아리를 운영해본게 지금 재직중인 학교가 처음은 아닙니다. 중학교에서 20명을 데리고 해 본적도 있고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11명을 데리고 해 본적도 있었죠.

나름 다년이라면 다년간 운영해보다보니 몇 가지 운영의 방침...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바로 다음의 셋인데요,

1) 인원은 8명 미만으로 할 것
2) 하루에 한 게임만 할 것
3) 베스트셀러는 기피할 것

이곳에도 모임을 운영중인 많은 분들이 계시고, 나름의 적정인원에 대한 어느정도의 기준이 있으실텐데 저는 4명, 혹은 3명으로 쪼갤 수 있고 합쳤을 때 6명~8명 단위로 쪼갤 수 있을 것...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게임의 적정인원이 3~4에 포진되어있고, 그럭저럭 괜찮은 파티게임의 적정인원은 6~8명이거든요. 아마 공감하시는 분들 많으시리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4의 배수로 하면 되는거 아니냐, 12명, 16명은 왜 안될까 라는 의문을 가지실 법도 한데, 이는 두 번째 방침 때문입니다.

이건 제 성향도 한 몫 거들고 있긴 한데, 아이들이 스스로 활동을 통해서 지식을 구성해나가야 한다는 요즘 취지에는 조금 벗어나있긴 하지만 저는 제 수업시간은 오롯이 제 것으로 활용하는 스타일이에요. 설명의 주체도 교사고, 관리 감독의 주체도 교사고, 제가 짜놓은 수업의 흐름에 아이들이 몸과 정신을 맡기고 참여하다보면 배움이 일어나는 현장을 추구하는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성향이 자연스럽게 동아리활동에도 영향을 끼치는데요, 바로 하루에 한 게임만 한다는 부분이에요.

물론 교사가 학습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수업방식도 좋지만, 이게 저희 동아리에 적용이 될 때 까딱 잘못하면 "게임 쥐어주고 교사는 시간만 보내는 현장"으로 비춰지기 쉽거든요. 올해 동아리 구성시기에 가장 속쓰렸던 부분이 이 부분인데, 인원을 8명으로 제한하니까 적잖은 선생님들이 "보드게임 그거 대충 애들 게임 던져주면 되는건데 게임 5개쯤 사고 애들 스무명쯤 받으세요" 라고 하시더라고요. 물론 저렇게 하면 저야 편하긴 하겠지만, 그럴거면 아싸리 독서동아리같은거 하고 말죠. 여러분들이야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이거 규칙 설명해주는것도 마냥 쉬운건 아니잖아요? 아무튼, 저런 이미지는 제가 그리고 있는 보드게임 부의 그림과는 많이 동떨어져있습니다. 그래서 "게임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누가 와서 보더라도 교육현장의 형태를 하고있는 활동으로 인식 가능하게" 하는걸 가장 중요한 방침으로 정했어요. 그래서 어디까지나 제가 아이들을 꽉 쥐고 관리감독 할 수 있도록 한 판에 3~40분 되는 게임 위주로, 규칙설명 포함해서 하루에 두 판 정도를 기준으로 잡고 운영중입니다. 당연히 두 테이블을 돌려야하니 게임이 두 세트를 동원할 수 있는 게임으로 국한되고요.

그러니 우리 동아리의 활동은 이렇습니다. 수업 종이 울리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책상 네 개를 붙여서 각각 두 테이블을 만들고, 한 테이블에 여덟명이 2인 1조로 4인플 처럼 앉아서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른 테이블로 가서 4-4 두 테이블을 돌리죠. 그동안 저는 끊임없이 규칙을 설명하고, 에러플레이를 잡고, 그 와중에 지나치게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도록 옆에서 계속 야부리(...)를 텁니다.

▲ 아니 거기서 그걸 남긴다고???????

더불어 하나의 방침이 더 있는데요, 베스트셀러는 피할것...입니다. 할리갈리, 루미큐브, 젠가, 모두의 마블, 스플렌더, 도블, 우노 등등 이 친구들 좋은 게임이긴 하지만, 음....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제 욕심이긴 한데, 조금 더 날것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애초에 홍보 자체도 저런 "익숙한" 게임들은 다루지 않는다, 여러분이 알지 못했던 보드게임의 맛을 보여주마 라는 식으로 하기도 했고요. 어찌보면 동아리의 이미지와도 연계되어 있는데, 적어도 제 동아리를 "저건 내가 지도교사로 들어가도 되겠다" 라는 이미지의 동아리로 만들고 싶진 않았습니다. 밖에서 보기에 "난생 처음 보는 게임들을 선생님과 아이들이 짜임새 있게 활동하는" 이미지가 되었으면 했거든요.

아무튼 이렇게 세 가지의 여건이 제가 학교에서 보드게임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의 기초 원리입니다. 특히 첫 번째 여건을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냥 보드게임부 안하고 말겠어요.

3. 이것도 기억하세요. 취미가 일이 되면 괴롭다.
자, 이렇게 그 뜻도 거창하게 올해 초 2022 보드게임부가 발족하게 됩니다. 과연 현실은 어땠을까요?

애들이 수업시간에 앉아있는거야 대부분 타의로 인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뭐 수업시간에 제가 아무리 치밀하게 교재연구를 해와 짜임새있게 설명해도 머리위에 물음표 십수개가 뜰 수 밖에 없죠. 많은 아이들이 눈은 뜨고 있지만 그 시야의 끝엔 제 수업이 아니라 "아 어제 그랩만 피했으면 캐리했는데" 라는 어제 본인의 무빙에 대한 고찰이 있고, 그럴 수 밖에 없다는걸 잘 알고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은 제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하지만 저희 동아리는 무려 면접이 있는! 경쟁률이 1이 넘는! 그런 동아리입니다. 말인 즉슨, 다른동아리와 다르게 <의지가 있는 아이들이 경쟁을 뚫고 들어온> 순수 100% 자의로 앉아있는 녀석들이라 이겁니다. 후후.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애들이 말이에요,

설명을 안들어요.

이자식들 이럴거면 왜온거지 싶을정도로요.

보드게임 설명할때(이자 모든 교육현장에서)의 가장 큰 적은 역시 핸드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규칙 설명 시 교사의 권위와 약간의 험한말로 아이들이 일단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그게 곧 100% 수용학습을 의미하지는 않더라고요. 8명정도는 앉은자리에서 룰을 머리에 땅땅 때려박아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설명하는 도중에 머릿속으로 다른생각 하는 녀석들이 이렇게 많으리란 생각을 못했습니다. 심지어 4인만 추려서 주말에 특별활동 할 때에도 그 중 한 녀석은 매번 핸드폰도 없는데 머릿속으로 이세계 다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여요. 아 이 애증의 학생놈(빠드득)

▲ 규칙설명할때 초점잃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본 저의 머릿속

이 부분이 현실과 이상이 가장 큰 차이를 보였던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에서도 설명을 할 때 4인 모두가 퍼펙트 습득을 하는게 아니니까... 어찌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부분이기도 하고, 게임 목록을 보시면 알겠지만 도스피나 넷러너, 루트 같은 게임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아무튼 스컬킹과 아발론 정도는 사실 한 테이블만 돌아가기도 하고,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게임이라 저런 문제를 겪지 않았는데 코린트 레벨만 되어도 설명 후에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거지? 헤헤" 하는 녀석들이 테이블별로 꼭 한 명 씩은 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설명할 때 부터 요주의 인물들과 지속적으로 눈을 맞추면서 기습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하고...ㅋㅋㅋ

▲ 마, 핸드 제한이 몇장이라고?? 칵씨 팍씨

그래서 규칙 설명을 한 후 실제 활동에 들어갈 때 굉장히 바쁩니다. 테이블 사이를 쉴틈없이 종횡무진하며 아이들 하나하나에 붙어서 고스트 보드왕을 찍어야해요. 여러 날에 거쳐 한 게임을 진드감치 파고들 수 있는 취미 모임과 다르게 동아리의 게임은 어지간하면 한 주 한 게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거든요. 거기에 요오오오즘 아이들은 즉각적인 보상이 없으면 빠르게 흥미가 식어버립니다. 저희같이 이리저리 맞으면서 배운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구요. 그러니까 현재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를 [찾는 법]을 마치 훈수가 아닌 것 처럼 은근~ 하게. 그런 느낌같은 느낌으로 도와줘야 아이들이 빠르게 흥미를 붙이고 유지해나갈 수 있더라고요. 운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고스트 보드왕을 얼마나 잘 하냐에 따라 아이들이 빠르게 재미를 붙이고 전략 싸움을 하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인원을 너무 많이 받지 않는다는 지침과도 상통하죠. 위에 괴롭다곤 했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도 재미있긴 합니다.

▲ 감정이입 300%, 아니 아이들이 여덟명이니까 800%.

4. 해 본 게임들
세어보니 올해 딱 10여개의 게임을 플레이했네요. 하나하나 소회를 풀어볼까요? 학기 초 부터 플레이 순서대로 나열하면요,

[스컬킹]
간단하지만은 않은 트릭테이킹 장르의 게임. 플레이에 "0승 선언에게 선물을 드린다" 라는 선택지가 들어간다는걸 깨닫게 된 후부터 제대로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트릭테이킹을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들이 으레 그렇듯 카드를 억지로 내야한다, 카드를 억지로 뽑아낼 수 있다 등에 대해 지도하는게 관건이긴 했는데, 사실 스컬킹은 거기까지 안가도 웃고 떠들기에 충분히 재밌고, 거기까지 가면 전략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좋은 게임이에요.

[아발론]
소셜 디덕션 장르의 바이블. 8인 지원이 되는 시점에서 이 게임을 안 할 이유가 없죠. 매번 이 게임을 도입할 때 "마피아 많이들 하지? (네) 근데 마피아 게임의 단점이 있다면 뭘까? (첫날 죽으면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준비했어. 사망자 없는 마피아!" 라고 도입을 하는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의 비난과 [억까]가 난무하는 판은 왜 싸움구경이 재밌는지 여실히 알려줍니다. 시크릿 히틀러도 같은 분야에서 꽤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저는 아발론이 조금 더 낫더라고요.

[코린트]
클레버 시리즈라는 걸출한 롤앤 라이트가 있긴 하지만, 테마가 있으면서도 규칙이 간결하다는 이유로 선택. 이때까지 했던 게임 중 가장 인터액션이 적어서 그런가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기승전...까지도 못가고 기승즈어..... 이런 수준에서 게임이 끝났습니다. 롤앤라이트가 다 그렇죠 뭐.

[도미넌트스피시즈]
따로 글을 쓴 적도 있을 정도로 강렬했던 게임. 경쟁 속에서 공존을 찾는 아이들의 모습이 깊게 아로새겨진 경험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올 한해 보드게임부 활동의 가장 강렬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이 날 "이렇게 해야 다 같이 재밌잖아요" 라는 말을 들은 순간과, 최종점수 단계에서 세 명이 동점이었던 순간을 들 것 같습니다.

[배런파크]
괜찮은 타일놓기 게임이 많긴 하지만, 제가 배런파크 러시아판을 보유중이라는 이유로 선택한 게임. 코린트와 마찬가지로 큰 인터액션이 없다보니 전반적으로 심심하게 흘러갔습니다. 이 때쯤 아이들에게 벽겜은 먹히지 않는다는걸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주사위 결과에 따라 나름의 들썩들썩이 있는 코린트보다 더 밍밍...

[루트]
도스피로 아이들의 수준을 가늠해 본 후 이게 가능할까? 싶어서 시도한 루트입니다. 비대칭형 게임이다 보니 한 두판만으로는 온전히 즐겼다 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3일동안 15시간정도 잡고 줄창 루트만 돌렸어요. 3일정도 되니까 고양이 목재 보급선 끊어먹기나 일부러 이어리를 살려서 모병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이는 등 나름 성공적이었습니다.

[렉시오]
클라이밍과 트릭테이킹은 비슷한 듯 다른 게임이죠. 패가 강제적으로 뽑혀나가는 트릭테이킹과 달리 클라이밍은 패를 내는 타이밍과 조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폭이 넓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티츄로 가기위한 가교로서의 의미로 활동했습니다. 항상 생각하는데 패 섞는게 너무 번거롭다는 단점만 빼면 훌륭한 클라이밍 게임이에요. 손패 만지작거리는 맛도 좋고, 2번 타일의 강렬한 아트웍도 인상적이죠.

[티츄]
렉시오는 5장의 족보 사이에도 강약이 있어서 생각보다 조패를 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습니다. 동시에 내 족보도 꽤 쉽게 밟히고요. 그거에 비해 조패의 선택지는 줄이는 대신 줄어든 사고량을 팀전이라는 변수로 보장해주는 티츄는 당연하게도 더 매운맛으로 다가오죠. 실패할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실패하지도 않았습니다. 투덱 티츄 하나면 서너시간 활동은 그냥 보장이죠.

[아컴호러카드게임]
도스피로 고급 전략게임을, 루트로 비대칭 전략게임을 해 본 친구들에게 다음으로 들이밀었던 덱빌딩 협력 게임. 사실 아컴호러 카드게임은 살짝 운영에 실수가 있었는데, 처음이니 간단하게 회합을 하자고 정해놓고 정작 카드풀은 던위치-카르코사-끝의식까지 땡겨서 썼다는 것.... 이런 게임들은 익숙해지기 전까진 많은 선택지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아싸리 기본판 카드만 쥐어주고 게임하게 만들 걸 그랬어요. 마지막에 스키즈 오'툴을 잡았던 친구가 보스의 어그로를 혼자 끌면서 돌아오지 못할 걸 알면서도 깊은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모습이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다들 그 숭고한 뒷모습에 마음속으로 눈물을 씹었죠.

[안드로이드넷러너]
아컴호러 카드게임으로 FFG의 덱빌딩을 경험해보았으니 오랜 꿈(...) 넷러너 단체 운영을 시도해봅니다. 오히려 이쪽이 허들은 더 낮더라고요. "유희왕처럼 자신의 덱을 짜서 상대와 뚝배기 싸움을 하는것이다." 로 소개가 끝나니까요. 이러나 저러나 유희왕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어마무시한가봅니다. 다만 역시 비대칭 게임이다 보니 상대의 흐름까지 읽을 수 있어야 온전히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건 여전히 단점.

4. 마무리
어디선가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요즘 아이들이 인터넷 기반 게임들을 할 때 유달리 입이 험한건 모니터 너머의 상대방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요. 굉장히 공감이 가더라고요. 라떼는 말이죠, 오락실에서 상대방을 조롱했다간 바로 의자가 날아왔거든요? 부모님 안부는 진짜로 "어머니 건강히 잘 계시니" 라는 의미였다구요.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사실 보드게임은 아이들에게 상대방을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는 놀이매체의 최전선에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테이블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든 보드게임은 기본적으로 테이블 위에 [존중]이라는 컴포넌트가 항상 존재한다는걸요. 이겼을 때 뿌듯하고, 졌을 때 승자에게 온전히 찬사를 보낼 수 있는 놀이매체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우리 동아리는 아이들의 문화에 긍정적 영향을 보태어 줄 수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보드게임이 아이들이 하기엔 좀 고가이기도 하고,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자체적으로 즐기긴 좀 어렵잖아요? 이렇게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것 자체에서 나름 자부심을 느끼면서 한 주 한 주 활동하고 있어요. 아이들의 만족도도 높구요.

10월도 중반에 접어든 지금, 저희 아이들은 어디가서 "나 보드게임좀 해봤어" 라고 할 정도의 커리어를 쌓고있습니다. 얼마전에는 1인당 니세이 시스템게이트웨이를 한 팩씩 뿌렸는데, 지들끼리 덱짜서 점심시간에 놀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문득 MTG 덱짜서 점심시간마다 친구들하고 놀던 20년전의 제가 떠오르고 막 그랬습니다. 음,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그래요. 언젠가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죨리게임을 즐기면서 부루마불 외의 보드게임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아이가 자라서 제가 되었거든요. 우리 아이들도 고등학교 시절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보드게임부를 운영하던 선생님이 계셨고, 모두의 마블이나 루미큐브 외에도 굉장히 다양한 보드게임이 있다...라는걸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취미생활을 정할 때 "아 그 때 보드게임 진짜 재미있었는데 보드게임 한 번 사서 친구들하고 해 볼까?" 라고 선택지에 등장했으면, 저는 충분히 보람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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