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한 적 없던 역사의 재현 - [에메랄드빛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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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20:36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돌아온 ‘나’는 하숙집을 찾던 중, 런던 경시청의 자문 탐정으로 일하는 특이한 ‘친구’를 소개받아 베이커가에서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어느 날 경시청의 경감인 레스트레이드가 '친구'를 찾아오더니 빅토리아 여왕의 손님인 어느 왕족이 살해당했다며 비밀스러운 수사를 의뢰합니다.
이에 ‘나’는 ‘친구’와 함께 사건의 비밀을 쫓기 시작하고, 마침내 2인조로 활동하는 사악한 변장의 명수와 절름발이 의사를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합니다.

<'주홍빛 연구'와 '에메랄드빛 연구'>

홈스 시리즈의 첫 장면을 떠올리는 분도 있겠지만, 위의 내용은 ‘주홍빛 연구’가 아닌 ‘에메랄드빛 연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존 왓슨이 아니라 서배스천 모런, ‘친구’는 셜록 홈스가 아니라 그의 라이벌인 제임스 모리어티, 이들이 뒤쫒는 2인조의 정체가 바로 홈스와 왓슨이지요.

심지어 이 세계의 빅토리아 여왕은 700년 전 바다에서 나타나 인류를 굴복시킨 존재로서, 인간의 입으로는 그 진정한 이름을 발음할 수 없기에 다만 빅토리아라 불릴 뿐입니다.

여기까지는 영국의 소설가 닐 게이먼이 발표한 단편 소설 ‘에메랄드빛 연구’의 배경입니다.

<'에메랄드빛 연구' 1판>

그리고 마틴 월리스는 2013년에 이 소설로부터 영감을 받아 동명의 게임을 발표했습니다.
이 게임이 지금부터 소개할 ‘에메랄드빛 연구A Study in Emerald’, 혹은 ‘스터디 인 에메랄드’입니다.

게임의 설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882년, 세계는 고대의 존재에게 지배받고 있으나 스스로를 회복주의자라 칭하는 일군의 세력이 이들과 은밀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존재를 추종하며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세력 또한 존재하니, 이들은 스스로를 충성파라 칭하며 왕족들을 암살로부터 보호하려 합니다.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소속 세력의 승리를 위해 요원을 운용하고, 각국의 도시를 탈환하며, 전 세계에 전쟁 또는 혁명의 불길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충성파와 회복주의자>

'에메랄드빛 연구'의 시스템은 덱빌딩을 중심으로 영향력, 액션 포인트, 레이싱, 비밀 정체 운용 등의 요소가 혼란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카드를 획득해 덱을 확장하려면 먼저 영향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며, 이렇게 획득한 카드들을 통해 덱을 순환시키며 다채로운 액션들을 수행하게 됩니다.
기본적인 액션은 영향력을 넓히고 요원을 움직여 왕족을 암살(회복주의자의 목표)하거나 은폐(충성파의 목표)하는 것이지만, 그 밖에도 별의별 해괴한 액션들이 다 존재합니다.
예컨대 플레이어는 뱀파이어가 되어 다른 요원들의 피를 쭉쭉 빨고, 좀비를 만들어 퍼뜨리고, 요그소토스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여차하면 크툴루를 소환해 도시 하나를 소멸시켜 버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조종하는 요원으로 왕족을 암살하려는데 알고 보니 그 요원이 다른 세력의 간첩으로 밝혀지고, 그래서 간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중간첩으로 밝혀지는, 뭐 이런 식의 정신 없는 전개도 벌어지지요.

게다가 이 모든 액션들은 플레이어의 세력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점수를 제공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모두의 정체가 공개되는 게임 종료 시점까지는 누가 어느 정도로 승리에 가까워진 건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임의 시스템만큼이나 전개 양상도 혼란하기 그지없는 것이지요.

<유럽 지도를 나타낸 복잡한 게임 보드>

결국 특정 세력을 대표하는 트랙이 끝까지 차올라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 때, 또는 특정 플레이어가 승리에 필요한 점수를 비밀리에 모두 모았을 때 게임은 종료됩니다.
(그 밖에도 회복주의자의 첫 번째 요원이 사망하거나 미쳐 버리는 경우, 좀비가 전 세계를 뒤덮는 경우 등 특수한 종료 조건이 존재합니다.)
이때 승점이 가장 낮은 플레이어가 속한 진영에서는 아무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즉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자신의 점수뿐 아니라, 같은 세력으로 추정되는 다른 플레이어의 점수까지 함께 챙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복잡한 승리 조건 같지만, 이는 세력 전체에 보상을 주는 게임 내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장치에 해당합니다.

기본적으로 게임의 세계관이 세력 간의 대결 구도에 기초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진행 중인 게임 상황>

시스템으로만 보자면 이 게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실험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작가 스스로도 밸런스에 대해서는 '모르겠고 그냥 즐겨 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1판이 발표되고 몇 년 후에 2판이 출시되면서 규칙이 대폭 간소화되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보드게임긱 등 커뮤니티에서의 전반적인 평가는 2판보다 1판에 더 호의적입니다.
이는 아마도 혼잡하기 그지없는 1판의 시스템이, 사실상 <에메랄드빛 연구>의 정체성 및 세계관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 요소 측면에서도 1판은 19세기 단색 출판물의 분위기를 음습하게 표현하는 반면에, 이안 오툴이 일러스트를 담당한 2판은 마치 최근의 그래픽노블처럼 컬러풀한 느낌이 강합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지만, 하나의 세계를 재현한다는 측면에서는 여러모로 1판의 시도가 더 유의미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1판과 2판의 카드 비교>

'재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이 게임이 어떤 세계를 재현한다고 말하려면 거기에는 재현 대상인 세계가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셜록 홈스의 세계를 다시 한 번 꼬아서 만든 이중의 허구 세계일 뿐입니다,
이처럼 실제로 존재한 적 없는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더욱이 별다른 텍스트의 도움 없이 게임 속에 재현한다는 것은 그저 공허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틴 월리스는 19세기를 표현할 수 있는 온갖 문학적, 미술적 인용들을 한데 버무림으로써 '에메랄드빛 연구' 속에 단단한 세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홈스 시리즈 및 크툴루 신화의 존재들은 물론, 실제 역사나 예술 작품 속의 존재들이 총 100장에 이르는 카드 속에서 세계의 곳곳을 메우는 것이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에 빈자리는 서사뿐이며, 그 서사를 채워 나가는 것이 곧 플레이어들이 맡아야 할 역할입니다.

<개성 넘치는 영구 효과 카드들(뒤쪽에 프로이트 박사님)>

특히 각각의 요일 이름으로 명명된 플레이어별 시작 덱은 G.K.체스터턴의 ‘목요일이었던 자’를 인용한 요소인데, 이 소설은 게임과의 연관성이 아니더라도 아주 재미있게 읽을 만한 작품입니다.

<플레이어별 시작 덱>

작가 스스로 규칙서에서 언급하고 있듯, 이 세계를 세밀하게 조명하는 것은 진정한 역사를 쌓아 나갈 플레이어들의 몫입니다.
짧으면 짧은 대로 허무한 단편, 길면 긴 대로 거대한 장편 소설을 완성해 가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 게임은 흔히 말하는 스토리텔링 게임이 아님에도 매번 새로운 책을 펼치는 듯한 놀라운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괜찮다면, 즐거움을 넘어선 감동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에요.

<어째서인지 등장한 좀비>

게임에 좀비를 등장시킨 이유에 대해서도 마틴 월리스는 유행 때문이 아니라 당대 무정부주의자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쓸데없이 덧붙이자면, 저는 마틴 월리스가 (아마도 유행 때문에) 디자인했다가 시원하게 말아먹은 좀비 게임 '힛 Z 로드'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유행이 뭐 나쁘다고.

<어떤 대체 역사에서는 유행을 선도하고 있을 '힛 Z 로드'>

이미 오래전에 발표되었다가 딱히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이 사라진 게임을 소개하는 건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은 꼭 ‘에메랄드빛 연구’라는 게임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의 게임이 세계를 담아내는 방법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보드게임을 즐기며 각기 다른 반짝이는 순간을 경험하고, 그러한 경험을 말과 글로 공유하는 것 또한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일지 모르지요.

적어도 저는, 그런 즐거움을 믿고 싶습니다.

*본문의 이미지는 모두 boardgamegeek.com에 공유된 이미지들입니다.
*마틴 월리스가 ‘앙크모포크’를 ‘낸티내킹’으로, ‘브라스’를 ‘랭커셔’와 ‘버밍엄’으로 다시 살려냈듯, '에메랄드빛 연구' 역시 언젠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출판되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다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닐 게이먼의 원작 소설은 작가가 직접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해 두었습니다. 원문과 함께 웹상에서 읽을 수 있는 번역본 링크를 소개해 봅니다. (원문 / 번역본)

*저는 오래전에 이 게임을 카드까지 세심하게 번역된 상태로 구해서 즐겼는데, 그러면서도 누가 이런 작업을 했는지에는 쭉 무관심했습니다. 이제서야 인쇄물 뒤의 이름을 확인하고, 당시에 이런 멋진 게임을 번역해 주신 의지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