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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라, 나와 잘 맞을까?

11,407 조회

2021.06.14 21:03

다이스트리 게임즈판 (좌), 알레아판 (중), 위버플레이판 (중상), 리오 그란데 게임즈판 (중하), 윈드라이더 게임즈판 (우)

안녕하세요? skeil입니다.

내일부터 태양신 라 한글판 주문이 시작된다고 해서 그 게임이 어떤 게임인지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한자 토이토니카 때에도 그랬지만, 해당 업체로부터 뭔가를 받은 건 아니고, 그 게임을 좋아해서 팬심으로 쓰는 글이라는 것을 미리 밝힙니다.

마찬가지로, 바쁘신 분들을 위해서 이 게임과 맞지 않은 분들을 먼저 적어 드립니다.

1. 1인플이나 2인플만 하시는 분

공식적으로 태양신 라는 2인부터 5인까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저는 보통 3-4인 게임으로만 하고, 긱에서도 3-4인이 최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3-5인 게임으로 진행하다가 나머지 사람들이 턴을 잃고 둘만 남은 게 2인플 분위기와 비슷하지 않겠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태양신 라를 2인플로 해 본 적이 없어서 그건 모릅니다.

두 명이라고요?

그러면 그냥 다른 게임을 하시지...

2. 경매 게임을 싫어하는 분

태양신 라는 크니치아 박사의 경매 삼부작 중 막내로, 큰 형인 모던 아트의 원스 어라운드 경매에 몇 가지 요소가 추가된 느낌입니다.

경매뿐만 아니라 다른 메커니즘을 쓰는 게임들도 많이 있지만 태양신 라는 경매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정말로 경매 게임입니다.

최신 유로 게임들처럼, 득점 루트가 다양하고 전략적인 게임을 좋아하신다면 이 게임과 안 맞을 확률이 높습니다.

3. 운 요소를 싫어하는 분

이 게임은 운 요소가 매우 큽니다.

주머니에 180개의 좋은 타일과 안 좋은 타일이 섞여 있고,

크게 보면 플레이어들이 돌아가면서 주머니에서 타일을 뽑아서 놓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내가 무얼 뽑을지 알 수 없고, 일단 뽑았으면 내 턴이 끝나 버립니다.

좋은 게 뽑히길 바란다면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큰 그림을 그리며 전략을 세우는 플레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게임이죠.

자, 그러면 덜 바쁘신 분들을 위해 태양신 라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한글판 제목은 "태양신 라", 영어판 제목은 그냥 "Ra"입니다.

아마도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검색할 때에 '라' 한 글자만 치면 검색이 제대로 안 되니까

앞에 '태양신'을 붙여서 불렀던 게 굳어져서 지금의 한글판 제목이 된 거라고 추측합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라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태양신입니다.

이집트 신화는 아무래도 그리스/로마 신화에 비해 덜 알려져 있어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요.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아는 만큼 보이죠.

크니치아 박사는 테마랍시고 뭔가를 씌우는데 테마성이 안 느껴져서 테마가 게임과 따로 논다는 지적을 예전부터 많이 받아 왔고요.

태양신 라도 테마성이 안 느껴지는가 싶었는데, 고대 이집트에 대해서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이 게임에 테마성이 없는 건 아니더라고요.

몇 달 전에 어느 무명의 유튜버가 고대 이집트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어 올려놨는데... ~~(제 채널 앞광고)~~

이집트는 사막에서 농사가 가능한 아주 드문 국가입니다.

그게 가능했던 게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 그 나일강이 운반하는 부엽토(腐葉土),

그리고 일년 내내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이런 기적적인 자연환경 덕에 태양을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겠죠.

라는 매의 머리를 하고 머리에 태양을 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요.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일종의 돈 역할을 하는 태양 마커로 경매에 입찰을 하고,

주머니에서 뽑히는 라 타일들은 태양 트랙에 진열됩니다.

마치 태양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요.

기존 판본에는 없었지만, 얼마 전에 공개된 사진을 보니 파란색의 여성이 몸을 아치 모양으로 구부리고 옆드린 모양이 보였는데요.

그게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여신 Nut 누트입니다.

(다른 신화들과 다르게, 이집트 신화에서는 하늘의 신이 여성이고, 땅의 신이 남성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라가 배를 타고 하늘의 신인 누트의 몸을 따라서 이동한다고 믿었거든요.

이집트 문화에서 쇠똥구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그 모습이 태양을 움직이는 것을 떠올리게 해서라고 합니다.

검색해 보니 이집트 신화에 얼굴이 쇠똥구리인 신도 있더라고요.

이 게임에는 8개의 신 타일이 있는데, 얼굴 모양은 서로 다르지만 효과가 동일합니다.

이집트 신화에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을 위해서 구별하기 쉽게끔 동물 얼굴 신들만 선택한 게 아닌가 싶네요.

이집트 테마의 게임답게, 우리가 알 법한 것들도 보입니다.

왕이었던 파라오도 있고요.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이집트 특유의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문명 타일에 종교, 농사, 조각, 점성술, 기록 등 당시 이집트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고요.

기념물 타일에는 피라미드,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등이 그려져 있는데, 아직까지 이집트에 남아 있는 유물들이죠.

사진 출처: 보드게임긱의 wojtek chuchla (wc poland)

테마 관련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요.

이제는 규칙과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크니치아 박사가 Knizia auction trilogy 경매 삼부작이라는 훌륭한 작품들을 디자인했습니다.

첫 번째가 Modern Art 모던 아트 (1992), 두 번째가 Medici 메디치 (1995), 세 번째가 Ra 태양신 라 (1999)입니다.

뭐, 간혹 네 번째 작품으로 Dream Factory 드림 팩토리/할리우드 골든 에이지 (2000)를 꼽는 사람들도 있는데,

위 세 작품보다는 아래 급으로 취급받죠. (고스톱의 비광 느낌)

'경매' 하면 일반적으로 입찰하고 경매품을 낙찰받는 것을 떠올립니다.

여러 경매 방식이 있는 모던 아트와는 다르게, 태양신 라에서는 원스 어라운드 방식 하나만 사용하는데요.

누군가가 경매를 일으키면 여태까지 뽑아서 경매 트랙에 모아놓은 모든 타일 (+ 중앙에 있는 태양 마커)을 낙찰받기 위해 입찰을 할 수 있습니다.

경매를 일으킨 경매인의 왼쪽 플레이어부터 시작해서 경매인이 끝내도록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입찰 기회를 단 한 번씩만 갖습니다.

그래서 다른 경매 방식에 비해 진행 속도가 빠릅니다.

경매 속도가 빠른 또 하나의 이유는 제한된 입찰 금액만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경매 중에 플레이어는 자신이 가진 자산 중에서 원하는 만큼 입찰합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태양 마커 1개를 제시해서 입찰하는데요.

태양 마커에 적힌 숫자가 입찰 금액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입찰할 때에 여러 태양 마커의 숫자를 합쳐서 내는 것은 안 되고, 1개를 써서 입찰하는 것만 가능합니다.

게다가 플레이어들이 사용가능한 태양 마커들은 모두 공개 상태로 놓이기 때문에 계산이 복잡할 게 없습니다.

내 것과 남의 것, 태양 마커를 한 번 주욱 훑어 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진행이 빠른 세 번째 이유는 낙찰 횟수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 마커를 2-3인이면 4개, 4-5인이면 3개를 받고 게임을 시작하는데요.

낙찰을 받으면 입찰한 태양 마커가 경매 트랙 위로 가고 경매 트랙 위에 있던 태양 마커를 뒤집어서 내 앞으로 가져옵니다.

즉, 앞면의 숫자를 보이는 태양 마커가 내가 이번 시대 (= 라운드) 동안에 낙찰받을 수 있는 남은 횟수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게임이 잘 풀려서 돈이 많을 때에 상대를 돈으로 찍어 누르는 식의 경매가 이 게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앞면이 보이는 태양 마커가 없으면 이번 시대에 턴을 못 가지거든요.

이 게임은 총 세 번의 시대 동안 진행됩니다.

모든 플레이어가 턴을 가질 수 없거나, 또는 태양 트랙의 마지막 칸에 라 타일이 놓이면 그 시대가 종료됩니다.

만약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낙찰 기회를 일찍 다 써서 턴을 나만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아주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나의 1인 게임을 다른 플레이어들이 구경하게 되거든요.

경매는 라 타일이 뽑히거나 내가 라를 불렀을 때에 일어납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찰을 안 해도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켰기 때문에 아무도 입찰하지 않았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강제 입찰을 해야 합니다.

이 게임의 규칙이 정말 쉽고 간단한데, 잔룰이라고 할 게 이거 딱 하나인데요.

8칸짜리 경매 트랙이 타일로 가득차게 되면 플레이어들이 주머니에서 타일 뽑는 행동이 금지되고 나머지 행동 중 하나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수행할 수 있는 행동이 라를 부르는 것 하나만 남게 되어서 강제적으로 경매를 일으키게 됩니다.

만약 경매 트랙이 다 찬 상태에서 라를 불러서 경매가 일어났을 때에는 예외적으로 아무도 입찰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경매 트랙이 다 차서 경매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입찰 안 했을 때에는 경매 트랙에 있던 타일들을 전부 게임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자, 이 잔룰을 가지고 행복회로를 돌려 보면,

'어, 나밖에 안 남았네?!'

'경매 트랙 여덟 칸 다 채운 다음에 내가 입찰해서 한 번에 다 먹어야지!'

'만약에 경매 트랙에 안 좋은 타일이 섞여 있으면 다 채우고 일부러 입찰 안 해서 트랙 비우고 다시 뽑아서 채워야지!'

가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게 순순히 가능할까요?

석양이 진다...

위에서 잠깐 설명 드린 것처럼, 시대는 모든 플레이어가 턴을 가질 수 없을 때에도 끝나지만

태양 트랙의 마지막 칸에 라 타일이 놓여도 끝납니다.

주머니에 타일이 180개가 있는데, 그 중에 라 타일이 무려 30개입니다.

1/6 확률로 라가 뽑히는 겁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다 나가고 나 혼자 남았다면 태양 트랙에 라 타일이 꽤 여러 개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혼자 남아서, 뽑고 비우고 다시 뽑고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얘기죠.

마지막 라 타일이 놓이면 그때에는 경매가 안 일어나고 시대가 강제 종료됩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 Push Your Luck 운 시험하기 요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 존버 타다가 못 먹고 망하기도 하거든요.

좋은 타일 일찍 먹고 나갔다면 다른 플레이어의 불행을 팝콘을 먹으며 관람하는 것도 태양신 라의 재미 포인트입니다.

좋은 비GM: 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 라라 라라라~

시대가 종료되면 플레이어들이 점수계산을 하는데요.

절대 점수가 있고, 상대 점수가 있습니다.

못 쓰고 남긴 신 타일, 황금 타일, 범람한 나일강 등은 개수에 비례해서 점수를 받지만

파라오는 군주여서 그런지 플레이어들이 최다개수인지 최소개수인지를 가려서 득점과 감점을 받습니다.

관리를 잘 하면 점수를 공짜로 더 먹을 수 있지만 반대 상황이라면 점수가 계속 깎입니다.

치킨 게임이 될 것 같아서 파라오 경쟁에서 일찍부터 포기해도 됩니다만... ~~그 치킨은 나였고~~

파라오뿐만 아니라 문명 타일 (그리고 게임 종료 시엔 태양 타일의 숫자 합)에서 감점 요인이 있기 때문에

경매품을 잘 노려서 먹어야 합니다.

어떤 타일이 누군가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득점/감점이 좌우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신 타일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위에서 신 타일 얘기를 안 했는데요.

한 번의 행동으로, 소유한 신 타일을 원하는 개수만큼 소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동을 하려면 주머니에서 타일도 안 뽑아야 하고, 라도 부르지 않아야 하고,

내 턴 시작 시에 신 타일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비한 신 타일 1개마다, 경매 트랙에서 원하는 타일 1개를 가져옵니다.

나일강을 달리는 사람에겐 범람이, 세트를 모으려는 사람에게는 문명이나 기념물이 좋은 목표물이 됩니다.

점수가 상당히 잘 올라가거든요.

꽤 길게 얘기했는데, 이정도면 태양신 라를 대략적으로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할 건데요.

태양신 라는 1999년작입니다.

벌써 20년이 넘은 클래식한 작품인데요.

해가 갈수록 출시되는 게임들의 수도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지고,

또 전략 게임의 경우는 점점 더 복잡해지거나 세련되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나오는 게임들을 기준으로 하면 태양신 라가 기대하시는 것에 못 미칠지도 모릅니다.

이런 클래식한 게임들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줄어들고 있어서 예전 게임들을 재판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질 걸로 예상합니다. (유로 클래식 라인은 끝낸다고 하죠.)

보통 10년을 주기로 명작들이 재판되어 왔었는데요.

올드 게이머들은 많이 해 봐서 (질리도록 해서 ?) 커뮤니티에서 예전 게임들을 언급하지 않고,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게이머들은 커뮤니티에서 언급이 안 될 뿐 아니라 절판되어 구하기도 어려운 게임보다는 새로 나오는 게임에 관심주는 게 더 쉽죠.

그래서 과거에 명작이었다 한들 10년, 20년이 지난 후에도 잊히지 않고 관심을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느낍니다.

사막에서 수천 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피라미드처럼, 10년 후에도 또 그 다음 10년 후에도 태양신 라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