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서오세요, 나의 미술관에 - 더 갤러리스트

개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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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3 오후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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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Gallerist

▲마르셸 뒤샹의 [샘]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인간 배설물과 죽은 동물까지도 전시하는 오늘날의 전시회에 가서 우리는 직접적으로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큐레이터의 개념이다.
요컨대 궁극적 예술가는 제작자가 아니라 큐레이터이며, 그의 선택행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학예사, 큐레이터라고 불리우는 이 직업은 갤러리를 직접 운영하는 것 부터 다양한 갤러리의 미술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직업입니다.
이들은 좋은 미술품의 유통을 위해 미술시장을 활성화 시키며, 그 과정에서 작품의 예술성과 상업적 가치, 작가의 가능성 등 많은 면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이러한 능력을 키우기 위해 미술사나 미학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갤러리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리하고 조정해나갈 수 있는 경영능력 또한 요구되지요.

▲저를 비딸 라세다 라는 작가에 빠지게 한 기념비적인 첫 작품. 당시 구매를 고민하던 글이 아직도 보라에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한 갤러리의 갤러리스트가 됩니다.
예술가거리에서 숨겨져있는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하여 그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받게됩니다.
때로는 갤러리의 그림을 요구하는 손님께 파는 비즈니스맨이, 때로는 갤러리의 사무직을 고용하는 CEO가. 때로는 세계 시장에서 갤러리의 명성을 드높일 해외전담팀이 되어야 하죠.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끝나고, 가장 가치가 높은 한 갤러리의 갤러리스트가 승자가 됩니다.

오늘 이야기 해 볼 게임은 본격 직업체험 게임. Vital Lacerda의 명작, 갤러리스트입니다.

1. 어떤 게임인가?

▲갤러리스트의 메인보드. 상하좌우의 액션칸과 네 귀퉁이의 미술관을 볼 수 있습니다.

갤러리스트는 기본적으로 일꾼놓기 장르에 속합니다.

각 플레이어는 본인의 차례에 네 칸의 장소 중 한 군데에 자신의 갤러리스트 미플을 두고 장소 액션을 하게 되는데요,
예술가 거리에서는 숨어있는 예술가를 발굴하거나 활동중인 예술가로부터 작품을 사오는 액션을.
판매 사무소에서는 그림 판매에 관한 계약서를 따오거나, 보유중인 계약서에 맞는 그림을 판매하는 일을.
미디어센터에서는 새로운 직원을 고용하거나 작가를 홍보해 작가의 명성을 높이는 일을.
세계시장에서는 자신의 갤러리의 명성을 높여 세계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거나 대작의 경매에 참여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저 장소액션의 전이나 후로 [티켓을 뿌려서 고객을 모으는 액션]이나, [자신의 조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갤러리를 관리]하는 <관리 액션>을 수행할 수 있고요.

▲결국 돈이 많은 자가 승리합니다.

이러한 액션들을 반복하다가 [고객이 바닥나거나], [티켓이 바닥나거나], [미술계에 두 명 이상의 거장이 나타나거나] 이 세 개의 조건중 두 개가 만족되면 게임 종료 트리거가 발동되고, 종료 과정을 거친 후 각자의 갤러리의 전시 작품 및 판매 이력, 보유 현금 등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가장 높은 가치의 갤러리를 운영하는 플레이어가 승리합니다.

비딸 라세다의 대부분의 게임이 그렇듯 룰의 골격 자체는 담백하죠. 그리고 대부분의 게임이 그렇듯 게임을 운영해나가는건 담백하지 않고요. 한 번 이야기 해 볼까요?

2. 게임의 특징
아그리콜라 등으로 대표되는 일꾼놓기 게임의 특징이라면 <다양한 액션칸>과 <다수의 일꾼을 통한 여러 번의 선택 기회 제공>, <다른사람이 선점한 액션은 선택할 수 없음>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단적으로 아그리콜라는 3인기준 일꾼칸이 23개정도 되고, 극단적으로 동일 작가의 오딘을 위하여의 경우 60개가 넘죠.
따라서 대다수의 일꾼놓기 게임을 풀어나가는 메인 아이디어는 <수 많은 선택지중 남들의 행동을 고려해가며 자신의 전략에 필요한 칸을 선점해나간다.>가 됩니다.

갤러리스트의 경우 이러한 클리셰를 시원하게 때려부숩니다. 아래의 세 가지 특징을 보세요.
1) 액션칸이 네 개 뿐
2) 1인당 액션용 미플은 하나뿐
3) 라운드 종료시 미플을 회수 하는 개념이 없이 차례대로 미플을 옮겨서 플레이

재미있지 않나요? 일꾼놓기 게임이면서 고작 일꾼을 놓는 칸은 네 개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꾼도 4인플 기준 전체 네 개 밖에 없죠. 즉 한 명씩 일꾼을 놓으면 네 칸의 액션이 가득 차게 되는데, 심지어 1P~4P까지의 액션 후 미플을 회수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1P가 미플을 옮길 뿐이죠. 그런데 4인이면 빈 칸이 없을거 아니에요. 도대체 미플을 어디에 배치하란거죠?

이러한 부분과 관련된 갤러리스트의 핵심 시스템이 바로 [킥아웃액션] 시스템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플레이어들은 다른 플레이어의 미플이 위치한 액션칸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그 칸을 선점하고 있던 플레이어는 자신을 밀어내고 들어온 플레이어의 액션이 종료된 후 [킥아웃 액션]이라는 기회가 주어지죠.

▲ 주황색 플레이어가 미디어 센터에 미플을 놓으면서 노란색 플레이어가 킥아웃 기회를 획득하게 됩니다.

킥아웃 당한 플레이어는 관리액션이나 자신이 킥아웃 당한 해당 액션칸의 장소액션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관리액션보다 장소액션이 효율이 좋겠지만, 장소액션을 하기 위해서는 영향력이라는 자원을 소모해야 합니다. 이 영향력이라는 수치는 정해진 양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위치한 영향력 칸 아래쪽의 가장 가까운 5단위 칸까지 소비해야 한다는 것도 재미있네요. 예를 들어 자신의 영향력이 16이건 20이건 15까지 내려간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연히 이 영향력은 킥아웃 외에도 여기저기 많이 쓰이기 때문에 자신이 킥아웃당할 칸에 타이밍 좋게 미플을 남겨두면서 효율적으로 영향력을 깎아두는 플레이가 요구됩니다.

반대로 누가 어느칸을 선점하고 있는가에 따라 자신의 액션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현재 당장 필요한 액션이 있는데, 그 액션을 함으로서 킥아웃당한 상대방이 압도적인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면 한 걸음 돌아가는 것이 방법이 될 수도 있죠.

지금이야 리스보아에도 따라가기 액션이 있고 많은 게임들이 선택칸에 둘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당시 이 킥아웃 시스템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있네요. 확실히 킥아웃 시스템을 잘 이용하시는 분들은 액션을 남들보다 1.5~2배가량 더 하는 내공을 보여줍니다. 갤러리스트의 운영의 핵심은 바로 킥아웃을 통해 최대한 자신의 플레이를 유연하게 굴리면서 다른사람의 킥아웃을 억제하는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온 마스의 이야기를 했을 때 살짝 언급했지만 비딸 라세다는 리스보아 이후로 샌드박스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게임들은 다양한 선택지를 유저들에게 던진 후, 그 곳에서 유저들이 구성하는 점수엔진끼리의 경쟁을 시킵니다. 비유하자면 <무인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존하세요. 당신은 사냥을 해서 먹고 살 수도, 튼튼한 집을 지어서 먹고 살 수도,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도 있습니다. 게임이 끝난 후에 획득한 생존점수를 체크합니다.> 라는 이미지가 많아요. 위에서 언급한 오딘을 위하여도 그렇고, 테오티우아칸이나 자금성 등의 게임 역시 그렇죠. 하지만 갤러리스트는 그렇지 않아요. 칸반과 비뉴스에서 쌓아온 내공을 폭발시킨 갤러리스트는 <무인도에서 집을 지으세요. 여러분들은 거의 같은 방법을 사용하겠지만 그 과정에서의 미묘한 차이에 따라서 집의 가치가 달라질겁니다.> 라는 게임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하죠. 여러분은 모두 같은 선상에서 같은 도구를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합니다. 많은 게임들이 [어떤 도구를 선택하느냐에 대한 판단력]을 시험한다면 갤러리스트는 [어떤 타이밍에 어디에 집중하냐에 대한 판단력]을 시험할 뿐이에요.

따라서 갤러리스트의 경우 플레이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대동소이하니 이로 인해 끊임없이 눈치싸움을 하게 됩니다. 재미있는게 이 눈치싸움이란게 <다른사람을 방해해야지> 의 눈치싸움보다는 <쟤가 이걸 하기전에 이걸로 미리 이득을 봐 두어야지> 의 눈치싸움이라는거에요. 인터액션이 강한 보드게임의 대부분이 상대 때문에 내 플렌이 망가지는 케이스로 인한 강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는 특성이 있는 반면에 이 갤러리스트는 나의 선택이 누군가를 방해하는 일이 (세계 시장의 칸 선점과 티켓으로 인한 고객 유치 정도를 제외한다면) 잘 발생하지 않아요. 그 대신 인터액션이 "나 때문에 누군가가 덕보는 일"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내 액션으로 인해 누군가 킥아웃을 해서 이득을 보고, 내 구매로 인해 누군가가 보유하고 있는 그림의 가치가 함께 상승하는 식으로 말이죠. 이러한 부분은 다른게임에서 맛보기 힘든 테이스트입니다.

대략적인 게임의 특징은 이 정도로 이야기하고... 한 번 게임의 장단점을 살펴볼까요?

3. 게임의 장단점

▲ Vital+Ian+EGG = 구매. 증명은 여백이 부족하여 생략합니다.

매번 이 조합이 나올 때마다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이안 오'툴+이글 그리폰 게임즈]의 조합은 항상 유저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안 오'툴의 미려한 일러스트와 이글 그리폰 게임즈의 도톰한 타일 및 자체 트레이는 항상 옳죠. 박스의 크기는 조금 괴상하기는 합니다만... 물론 요즘들어 이 트리오가 컴포의 화려함 쪽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쏟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갤러리스트는 더함도 덜함도 없이 아이콘부터 색상까지 딱 좋은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특히나 메인 보드의 경우 액자에 걸어둬도 전혀 손색 없을 정도의 심미성을 자랑하죠.

게임 내적으로라면 역시 치열한 수싸움이 진행된다 라는 점을 들 수 있겠네요. 2인플을 하면 어지간한 경우 게임 종료 점수가 10점 이상 나지 않습니다. 한 타이밍 한 타이밍이 승부수고, 한 순간 한 순간 빈틈을 찾아야하죠. 이 역시 매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이러한 게임을 즐기시는 분들께는 꽤 좋은 선택지가 됩니다. 일꾼 놓기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못함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장점이 될 수 있네요. 개인적으로 선잡기 액션이 있는 일꾼 놓기 게임은 오른쪽 및 왼쪽 사람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안좋아하거든요. 갤러리스트의 경우 선은 게임 종료시 돌아가는 순번 정도에만 영향을 미칠 뿐 이미 한 타이밍 돌아간 후의 선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더불어 저런 구조 대신 작용하는 "남을 끌어내리는게 아니라 끌어올려주는" 형태의 인터액션 당했을 때의 스트레스를 감소시켜주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형태는 반대로 얘기하면 "아니 왜 쟤는 다른사람한테 저리 퍼줘?" 라는 종류의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게임에 초보자가 끼면 [빨대 꽂기]의 영향이 굉장히 커져요. 상술했듯 액션의 종류가 4칸 8개로 매우 적은 편이고 그 중 절반인 예술가 거리 및 미디어센터의 액션이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지라 미처 감을 잡지 못한 플레이어의 플레이보다 한 발 앞서(거나 바짝 붙어서 한 발 뒤에) 하는 액션이 매우 효율이 좋습니다.

▲상단 맨 좌측의 그림은 0+1명성/1티켓인데 두 번째 그림은 2+1명성/2티켓입니다.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우연히 높은 가격이 배치되었을 뿐이에요.

조금이나마 작용하는 운의 요소 역시 단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마다 구매 시 올라가는 명성이나 티켓의 수가 다른데, 명성도, 티켓도 적게 주는 그림이 있어요. 다음턴 구매 각인데 이런게 떠있으면 조금 기운빠지는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티켓을 적게주면 명성이라도 많이 오르고, 명성을 적게주면 티켓이라도 많이줘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데 신기하더라고요.

단점으로 써도 될 까 싶은 부분이기는 한데, 시장에 풀리는 그림의 개수를 설정하는 서명 토큰의 개념이 생각보다 에러플을 자주 불러옵니다. 그림을 사고 팔고 후원할 때 서명토큰을 항상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챙길 것이 많다보니 깜빡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근데 문제는 이걸 깜빡하면 게임이 휘청휘청해질 정도로 꼬인다는 부분이에요. 숙련자들끼리의 경기에서도 가끔 한 번씩 보이는 실수입니다. 조금 더 궁리해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있어요.

4. 마치며
비딸 라세다의 게임은 모두 훌륭하지만 갤러리스트는 특히나 흠 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테마와 미려하게 표현된 각 예술작품의 아트웍, 치열한 수싸움과 게임이 끝난 후의 지적 포만감까지 비딸 라세다를 상징하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기회가 된다면 꼭 플레이 해 보시기를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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