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이유로 이 게임을 팔았다] 1편. 워 체스트

KIMKUN

3,997

2020-4-18 오전 1:11

IP: 115.21.***.***

블로그 방문

팔로우

BEST

쪽지발송

내용 댓글59

제가 워 체스트를 플레이하고 혹평을 했을 때, 사람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추상 전략 안 좋아하세요?"

그러면 저는 말하곤 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저는 추상 전략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워 체스트를 추상 전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멀리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제 입문 보드게임은 "장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 모두가 그러시겠지만, 초딩 때(어쩌면 국딩)부터 '한 장기'한다고 소문난 그런 아이었지요.

저는 애초에 승부욕이 강한 편도 아니고, 물론 지금도 승부욕은 없는 편이지만, 이 당시 장기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히 강했습니다.

한창 PC방이 생기고(동전을 넣는 그것)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2 등이 유행할 때도 저는 실시간으로 손을 놀리고 순간 판단력이 요구되는 게임보다는 여러 수를 내다보며 한 수 한 수 조용히 생각하고 수를 두는 SRPG(삼국지 영걸전, 파랜드 택틱스, 밴티지 마스터 택틱스 등)를 더 좋아했습니다. 아마 이런 성향이 추상 전략으로 다져진 버릇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바둑에는 흥미가 없었네요. 아무래도 장기와 비교해서 전혀 테마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산토리니가 한국어판이 출판되고 산토리니 체험단에 선정되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게임도 정말 마음에 들었기에 종종 언급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물론 신 카드를 안 쓰고 기본 게임으로 즐길 때의 담백한 산토리니만 좋아하지만요.

이미 산토리니로 저는 매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기프 시리즈도 많은 분들께서 좋은 추상 전략으로 많이 꼽으시지만, 바둑과 같은 이유로 제가 썩 흥미를 느끼지는 않는 건 또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추상 전략 보드게임에 대한 갈증이 있었나 봅니다.

워 체스트에 대한 소문이 스멀스멀 국내 커뮤니티에 퍼져 나가더군요.

많은 분들이 워 체스트를 영업하시거나 소개할 때 "변형된 장기"라고 설명하시는데, 저 역시 그 변형된 "장기"라는 단어에 강하게 끌렸습니다.

물론 아브락사스에서 워 체스트 한국어판 선주문을 진행할 때, 당연히 고민 안 하고 들어갔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고민할 걸 그랬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해보고 판단할 걸)

나중에 워 체스트 한국어판을 수령하고, 심지어 오타에 대한 수정 카드를 수령했을 때까지도 저는 워 체스트를 플레이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드게임에 흥미를 완전히 상실했던 때이기도 하고 저 스스로 바쁘기도 했고)

게다가 아브락사스에서는 코인 거치대까지 과배송을 하는 바람에, 추가 금액을 지불하고(당연히 강제사항은 아니었습니다) 4명분의 코인 거치대까지 구비해 두고 있었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 뜻하지 않게 위치스브루에서 워 체스트(영문판에 한국어화를 한)를 처음 접하게 됩니다.

내심 기대도 하고 있었고요.

2:2 팀전에서 승리로 게임이 끝나고 나서, 저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 날의 플레이에 에러플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고 바라던 추상 전략 게임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건 그냥 백 빌딩에 장기를 묻힌 거 잖아?'

저는 이 게임의 포커스가 추상 전략에 맞춰진 것이 아닌 백 빌딩에 더 강하게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 빌딩에 장기를 결합하는 시도는 '백 빌딩을 이렇게도 즐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은 할 수 있었지만, 재미있다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게 보드게임 장르 추상 전략에서 제일로 꼽히는 거라고?'라는 의구심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괜찮다' 정도의 인상이었습니다.

이후, 이 의구심이 잘못된 것인가 싶어 여러 번 더 워 체스트를 즐기게 됩니다.

에러플이 원인일까, 에러플도 워 체스트를 반복하면서 하나씩 잡아나갈 수 있었고 바야흐로 에러플 없는 워 체스트까지 하기에 이릅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팀전에서 아군이 선을 가지고 있을 때는 같은 팀의 다른 아군이 선을 가져갈 수 없다는 규칙이 게임이 가진 전략성을 크게 떨어뜨린다고 느꼈습니다. 아군끼리도 선을 맞바꿔가는 것이 전략적으로 크게 작용할진데 이게 막혀 있음으로써 아군 병사의 턴 순서가 바뀌어야만 전황을 바꿀 수 있는 타이밍에, 굳이 선을 바꿔줄 필요없는 적군이 선을 가져오지 않고 그 턴을 계속 유지시킬 때, 아무 것도 못하는 그 허망함이란... 국왕 코인의 역할도 아군끼리 턴을 바꿀 수 있을 때의 가치와 그러지 못할 때의 가치가 상당히 크게 차이나고 말이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놀랍도록 재미가 없었고, 하면 할수록 '이건 추상 전략이 아니다, 추상 전략에 대한 모독이다'라는 생각에 빠져 플레이를 하는 것 자체에 불쾌감마저 느끼게 될 정도로 워 체스트 혐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추상 전략은, 지금까지의 대국을 통해 누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나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는 최선의 한 수 한 수를 실수 없이 원하는 타이밍에 두어 나가 상대와의 진검 승부를 겨루는 그런 게임입니다.

즉, 완벽한 나의 통제 하에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는 말들로 겨루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오히려 최선의 수가 오고 가서 누구 한 명이 실수를 했을 때야 비로소 승패가 정해지는 게임 말입니다.

하지만 워 체스트는 백 빌딩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말을 움직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먼저 병력을 구상할 때의 카드 운, 처음 뽑는 3개의 타일에 따른 운, 앞으로 게임이 진행되면서 있을 무한히 반복되는 뽑기 운.

게임을 이루는 전반에 걸쳐 요소에 운이라는 바탕이 깔려 있습니다.

백 빌딩 장르가 물론 직접 가방의 내용물을 구성할 수 있게 함으로써 확률 조정을 가능케 하여 플레이어로 하여금 '운을 컨트롤 하고 있다'라는 착각을 주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기나 바둑 같은 보드게임에서도 수 읽기와 확률 싸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워 체스트의 그것과는 그 결부터가 다릅니다.

반복해서 말하게 되는 데, 장기나 바둑은 최소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판단한 최적의 수를 둘 수 있지만, 워 체스트는 그럴 수 없습니다. 가방에서 내가 원하는 코인이 나와주지 않는다면 머리로 생각한 수를 실제 게임판에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최선의 수를 두는 것에 익숙한 저는, 가방 뽑기 운에 의해 최선의 수를 두지 못 하고 차선의 차차선까지 생각하게 되어야 할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꼈습니다.

워 체스트에서 재미를 느끼려면, 바로 이 확률에 실패했을 때 무너진 하늘에 솟아날 구멍을 찾는 것을 좋아할 필요가 있는데, 추상 전략 게임에 임할 때만큼은 철저하게 제 계획과 계산대로 흘러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저에게 워 체스트는 그냥 운빨 망겜이 불과했습니다.

대전을 하는 상대도 이런 점에서는 나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워 체스트를 하려면 먼저 나의 운을 계산해야 하고, 이어서 상대방의 운도 계산해야 합니다.

내 코인을 가지고 울며 겨자를 먹으며 차선의 차선으로 최선의 수를 생각해냈다고 해도, 상대방의 운까지 계산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손에 무엇이 있었느냐에 따라 결국 최선의 수라고 생각했던 수가 도박 수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게임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운'이라는 요소가 등장해 버리면, 아무래도 회의적으로 보게 됩니다.

'수 읽기' 싸움만 즐기는 것에도 수가 정형화된다는 한계가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운 요소도 그 수명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대중적으로 도박이 가진 한방의 쾌감(또는 적중의 쾌감)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당연히 운 요소 또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가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운 요소가 먹히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보면 '다음에는 맞출 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희망이 뒷받침되고, 그 희망을 잃었을 때 결국 수명이 다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애초에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노름판은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그 노름판의 주인이 돈을 벌게 설계되어 있다'는 사람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운 요소에 대한 매력을 어필할 수 없겠지요. 다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에 이런 도박적인 요소은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리고 '랜덤'이라는 표현은 앞으로도 유용한 게임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형세에 영향을 주는 랜덤 요소와 그렇지 못한 랜덤 요소가 있고, 후자는 게임의 전개 패턴을 다양화한다는 것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영향을 주느냐 안 주느냐 등 이분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형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랜덤 요소와 미미한 영향을 미치는 랜덤 요소'가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운 요소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운 요소는 현재 대체 불가합니다. 게임에 있어서 (물론 게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뒤쳐지는 사람이 가장 짧은 시간에 무언가를 이뤄내려면 운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운도 실력이라고 많은 분들이 표현하지만, 저는 '운은 실력이 아니다, 실력이 있든 없든 운이 가져다 준 결과는 그저 운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파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저는 운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고 생각하며, 저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때일수록 더 크게 무력감을 느끼곤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보드게임을 구매하면서 중고로 되파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구매해왔습니다만...

제가 가장 기대하고 관심을 가진 게임 중 하나였던 워 체스트가 위와 같은 이유로 제 첫 번째 중고 판매 게임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워 체스트를 좋아하시는 주인 분을 찾아가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게임을 게임으로써 즐기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되네요.

이 글이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을 눌러주세요!

내용 보기

팔로우

피드

저장

KIMKUN

님에게 댓글 작성

댓글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