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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로서의 ‘왓슨 앤 홈즈’

5,546 조회

2020.03.11 20:34

라이트 게이머인 무이입니다.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왓슨 앤 홈즈를 정룰

대신에 사건 책자, 장소 카드, 해답 카드, 참가자 말,

시작 플레이어 토큰만 사용하는 하우스룰로 플레이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건 책자들

1. 사건 번호에 맞는 책자를 가져와 제일 앞에 그려져

있는 대로 (아래의 사진처럼) 장소 카드, 해답 카드를

배치하고,

카드의 앞에는 장소 이름이, 뒤에는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 등이 적혀 있다

2. 책자 제일 뒤에 적혀 있는 배경 설명, 사건 개요,

해결해야 할 의문점들을 읽은 뒤,

3. 시작 플레이어를 정해 시작 플레이어 토큰을 주고

게임을 시작합니다.

시작 플레이어 토큰

4. 매 라운드 각 플레이어는 시작 플레이어 토큰을

가지고 있는 플레이어부터 왼쪽으로 돌아가며 한 번씩

차례를 가집니다. 자신의 차례엔 자신의 참가자 말을

(다른 참가자의 말이 없는) 원하는 장소에 놓고 그 카드

뒷면의 사진을 찍은 뒤 원래 있던 곳에 놓고 카드의

내용을 읽습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경우엔 인터넷

검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참가자 말

5. 해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답을

써둔 뒤 참가자 말을 놓는 대신에 해답 카드와 자신의

답을 비교한 뒤 게임을 끝내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두

게임을 끝낼 때까지 기다립니다.

해답 카드

6. 이렇게 한 라운드가 끝나고, 아직 게임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시작 플레이어 토큰을 왼쪽으로

넘기고 다음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게임의 진행을 빠르고 쾌적하게

하는 동시에 오직 추리에만 집중한 하우스룰인데,

게임이라고 할 수 있는지 살짝 애매하긴 합니다. 글의

제목을 리뷰가 아닌 ‘추리로서의 왓슨 앤 홈즈’로 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그럼, 이제 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소거법 게임(elimination game) 중에 압도적으로

복잡했던 슬러스. 1회플이라 게임을 제대로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하고 싶지도 않다.

A. 추리 게임?

보드게임에 입문하고 나서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용어가

‘추리 게임’이었습니다. 클루, 코드777, 슬러스와 같은

게임을 할 때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추리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단순한 소거법에 불과해 얼마나 기록을

잘하느냐를 다투는 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적인

노가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게임이 쉽다는 건 아닙니다. 슬러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을 받았었거든요.

소거법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아니메의 한 장면.

당시엔, 유식한 척하려고 너무나 당연한 사고방식에

이름까지 붙였다고 생각해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진 출처: 이니셜 D 4TH STAGE 9회 24분18초

캡처. https://bit.ly/2vPEckE

그러다 왓슨 앤 홈즈를 해보고는 처음으로 추리

게임이라는 용어가 납득이 가더군요.

(1) 추리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서 일단 추리가 뭔지

찾아봤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서 생각하는 것”으로,

귀납법(induction)과 연역법(deduction)이 대표적인

추리 방법이라고 합니다.

이 중 귀납법은 간단합니다. 여러 사례를 살펴 공통되는

특징을 끄집어내는 방법이니까요. 1, 3, 5, 7, 9, ?, ...

라고 했을 때 ?에 올 숫자를 알아내는 것처럼 말이죠.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는 추리 방법일 테고 말입니다.

연역법 게임(deduction game) 혹은 디덕션 게임이라는

용어도 있는 만큼 연역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면...

연역법을 사용하는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 소거법

게임과는 조금 다른 고양이 쥐 게임(cat & mouse game)

으로 한 플레이어는 잭 더 리퍼 역할을 하고, 다른

플레이어들은 4일 안에 그를 검거하거나 은신처를

찾아내야 한다. 은신처에 대한 정보가 4일 동안 누적되는

터라 깊이가 느껴진다.

(2) 연역법

연역법은 이미 알려진 사실(A)로부터 논리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실(B)를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와 같은 기호로 나타내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수학 시간에 볼 수 있는 ‘증명’을 들 수 있겠지만, 조금

더 간단한 것으로 삼단논법이나 소거법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소거법을 사용하는 게임을 디덕션 게임으로도

부르는가 봅니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서 기대하는

추리와는 많이 다릅니다.

(3) 가추법

추리 소설에 어울리는 추리 방법은

가추법(가설추리법, abduction)이 아닌가 합니다. 가추법은

현재의 상황(B)를 설명할 수 있는 ‘그럴듯한 가설’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기호로는

로 나타내면 어떨까합니다. 즉, 현재의 상황(B)를 설명하기

위해 역으로 ?에 올 것을 찾는 거죠. 예를 들어, 아래의

사진과 같은 범죄 현장(B)을 봅시다.

사진 출처: 보드게임긱 https://bit.ly/39kk9JC

실제로 어떤 범죄가 일어났는지가 ?인데, 그걸 모르니

?에 올 법한 가설을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Sherlook’이라는 보드게임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고 직거래를 하러 나갔다가, 갑작스런

네고 요구에 열 받은 나머지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우발적인 범죄로 연결되었다.’와 같은 가설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사건 현장(B)를 살펴 이 가설이

그럴듯한지를 따져 보는 것입니다.

‘그럴듯한’에서 감잡으셨겠지만 논리적으로 엄밀한 추리

방식은 아닙니다.

B. 왓슨 앤 홈즈

(1) 왓슨 앤 홈즈는 소거법 게임?

이제 왓슨 앤 홈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 게임은 일단 소거법 게임이 아닙니다. 소거법

게임에서는 답이 될 수 있는 후보가 미리 정해져 있고,

확실하게 답이 아닌 것을 하나씩 지워나갑니다. 하지만

왓슨 앤 홈즈의 몇몇 문제들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어 소거법이 먹히질 않습니다.

장소 카드. 오른쪽 아래에 카드 뒷면이 보인다.

(2) 뿌려지는 단서들

이런 문제들은 가추법을 적용해 그럴듯한 가설을 세워야

하지만, 그럴듯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단서에 비추어

보아야 하는 터라 일단은 단서들을 수집해야 합니다.

더구나 이런 단서들은 가설을 세우는 데 있어 시작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왓슨 앤 홈즈엔 주의를 돌리기 위한 가짜 단서를 포함해

제법 많은 단서가 뿌려집니다. 덕분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 수도 있고,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도 있고, 단서인지 아닌지 눈치채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면...

(3) 배경지식

핵심단서가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경우, 어떤 플레이어는

장소 카드 세 장만 보고도 답을 맞히는가 하면 어떤

플레이어는 카드를 다 보고도 답을 몰라 놀림을 받기도

합니다. 이 게임의 단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지점이라,

저는 게임 중 인터넷 검색을 허용했습니다.

(4) 반복되는 단서

에피소드에 따라서는 정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정답이 의외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단서인지조차 몰랐던

핵심적인 내용이 장소 카드 여기저기에 집요할 정도로

여러 번 언급됐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5) 숙련되는 추리

이러한 이유들로 감을 못 잡고 있는데, 다른 플레이어가

카드 세 장 보고 맞추는 걸 보면 맥이 빠져버립니다.

극복할 수 없는 차이라며 낙담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이것도 세 번쯤 하니까 늘긴 하더군요. 가추법에 대해

감도 좀 잡고, 중요한 단서에 대한 냄새도 잘 맡을 수

있게 되구요.

(6) 짧은 플레이 타임

이처럼, 소거법이 아니라 진짜 추리를 맛볼 수 있는 이

게임의 또 다른 장점은 접근성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하우스룰로 플레이하면 짧으면 30분 길면 한 시간 안에

게임을 끝낼 수 있고 규칙도 없는 거나 매한가지라

누구나 쉽게 해볼 수 있고, 특히 추리 소설이나 방탈출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테마에도 몰입하면서 플레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스무고개 방식으로 추리해나가는 블랙 스토리즈

(7) 블랙 스토리즈

가추법을 경험해볼 수 있는 또다른 간단한 게임으론 블랙

스토리즈가 있습니다. 이 게임은 단톡방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도 유명한데요... 서너 줄 정도의 황당한 상황이

주어지면 정답을 알고 있는 마스터에게 Yes 혹은 No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계속 던져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알아내는 게임입니다. 스무고개인 거죠.

연역법인 스무고개로 단서를 찾아내고, 이렇게 찾은

단서들로 이전 상황에 대한 가설을 세우는 게임이라

연역법과 가추법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블랙 스토리즈의 예시 문제. 플레이어들에게 주어지는 건

이게 전부다. 사진 출처: 블랙스토리즈 공식 웹페이지

https://bit.ly/2xdjmMk

(8) 방탈출

방탈출도 가추법과 유사한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거

같습니다. 방탈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단서가

흩뿌려지지만 정작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문제를 푸는 퍼즐과는 거꾸로,

주어진 단서들을 써먹을 만한 문제를 찾는 것이

방탈출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가추법과 같거나

유사한 추리 방식이 아닌가 합니다.

방탈출 게임 중 저의 한계치인 ‘천문학자 저택의 미스터리’

(9) 추리 게임의 분류

마지막으로, 생뚱맞지만 추리 게임을 간단하게

분류해보고자 합니다. (보드게임긱의 분류와는 다릅니다.)

추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귀납법, 연역법, 가추법만

생각해서 추리 게임을 아래와 같이 나누고,

가장 많은 연역법 게임을 다시 세분화해서 아래와 같이

나누면 어떨까 합니다.

마피아 게임도 연역법를 많이 사용하지만, 블러핑이나

역할극의 요소가 있어 추리 게임의 범주에 넣지는

않았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클루가 소거법 게임이고, 화이트홀

미스테리가 고양이 쥐 게임이며, 왓슨 앤 홈즈가 가추법

게임인 거죠.

C. 마무리

왓슨 앤 홈즈는 가추법을 통한 진짜 추리를 한 시간

안쪽으로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게임이

아닐까 합니다. 적절한 난이도와 노련한 단서 심기,

몰입하기 좋은 테마성 등 장점도 많구요. 하지만, 추리에

있어 여러 가지 이유로 개인차가 생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세 번의 플레이를 요하는 터라 결국 꾸준히

같이 할 파트너를 찾기 힘들 수 있습니다. 덕분에

의외로 끝까지 즐기기 힘든 게임이기도 하구요. 정말

좋아하는 게임인데 안타깝네요.

에피소드를 끝낸 지 오래인데, 추가 에피소드는 안 나오는

걸까요?

따로 언급하지 않은 사진의 경우 보드게임긱

혹은 텀블벅(https://bit.ly/3cMod7u)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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