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해적! 대포! 함대! 그리고 드래곤..? 드레드플릿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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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1 19:01

안녕하세요. 도색해야 할 미니어처가 산처럼 쌓여가서 괴로운 메피스톤입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 요즘 제가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는 드레드플릿에 대해 아주 상세한 리뷰를 해보려 합니다. 내용이 조금 많을 것 같긴 한데, 국내에 드레드플릿 관련 자료가 워낙 적습니다. 사실 잘 알려진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이 리뷰를 보시는 분들도 몇 분 안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혹시 이 게임을 저처럼 좋아하는 분이 계시다면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제가 애정으로 수많은 시간에 걸쳐 온갖 웹사이트의 구석구석을 뒤져가며 찾아낸 자료들을 가급적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리뷰할 예정입니다. 우선 오늘은 드레드플릿이 어떤 게임인지 간단히 설명하는 것으로 지면을 채워보겠습니다.

드레드플릿은 2011년 GW에서 출시된 해상전 게임입니다. 워해머 판타지 세계의 바다를 배경으로, 흡혈귀 군주 녹틸러스 백작에게 가족을 잃은 로스 선장의 복수극이 주 내용입니다. 나중에 스토리를 더 설명하겠지만, 드레드플릿 게임의 12개 시나리오는 이 내용을 충실히 따라갑니다. 고작 한 척의 배에서 시작한 로스 선장은 시나리오를 진행해가면서 흩어진 동료들과 하나씩 합류하고, 이 과정에서 사용 가능한 배들이 조금씩 늘어나 결국 5척의 연합 함대로 녹틸러스 백작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왼쪽이 로스 선장과 기함 헬든해머, 오른쪽이 녹틸러스 백작의 기함인 블러디 리버입니다.>

드레드플릿은 출시될 당시에 그다지 팬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2009년 스페이스 헐크라는 게임을 출시한 GW는 "한정판"이란 이름을 붙이면 게임이 불티나게 팔려간다는 것을 깨닫고, 이 전략을 드레드플릿에 또 써먹게 됩니다. 그러나 스페이스 헐크의 경우는 엄청난 조형의 터미네이터 미니어처들이 일반 워해머 40k 게임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는 엄청난 이점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팬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었지만, 드레드플릿의 경우에는 미니어처의 조형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스페이스 헐크 이상으로 훌륭했으나, 공교롭게도 미니어처가 다른 게임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스케일입니다. 즉, 드레드플릿 전용이라는거죠. 일반 보드게임 플레이어에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나, 워해머 팬들 중 상당수는 게임을 산다기보다 예쁜 모델을 사서 본 게임에서 쓴다는 생각으로 지갑을 여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 스페이스 헐크에 이어 GW가 자꾸 한정판 장사를 하려 하는 태도를 보이자 분노한 팬들의 목소리까지 더해져 결국 드레드플릿은 스페이스 헐크만큼의 성공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한 때 보드게임긱 워게임 순위 1위, 전체 순위 10위 안에 들었던 GW 역사상 최고의 단독 보드게임 스페이스 헐크(3판)>

그렇기 때문인지 출시 당시의 평가와 지금의 평가가 상당히 다른 게임이기도 합니다. 출시 즈음해서 올라온 글들을 지금 살펴보면, 감정이 상한 팬들이 평가를 다소 박하게 했던 경향이 분명 있습니다. 반면 몇 년 후에 작성된 리뷰의 경우에는 종전에 비해 평가가 훨씬 괜찮은 편입니다. 극단적인 사례로 출시 당시에 엄청난 네임드 보드게임 블로거(Q모분)가 본인의 블로그와 보드게임 긱에 엄청나게 게임에 대해 비판하는 리뷰를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난 후에 그래도 이 게임 괜찮아,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어, 하면서 하우스룰 등을 통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대로 게임이 영영 침몰하나.. 했으나>

결국 게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재평가가 이루어져 2018년, 가장 성공적인 토탈워 시리즈로 꼽히는 토탈워 2: 워해머에서 드레드플릿 캐릭터와 함선들이 대거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공식적으로 화려한 부활을 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2010년대 중반 이베이 기준 50달러까지 떨어졌던 중고 가격 또한 현재는 평균 150달러 선에서 가격이 형성되어 있고, 한정판의 특성상 수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격은 앞으로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잊혀져가던 드레드플릿을 관짝에서 끄집어낸 녹틸러스 백작>

드레드플릿의 장점을 하나만 꼽아보라고 한다면 역시 "분위기"가 아닐까 합니다. 바로 설명드리겠지만, 드레드플릿도 단점이 꽤 뚜렷한 게임입니다. 그런데 이 분위기 하나로 그 단점을 덮어버리는 엄청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게임 시작 전에 테이블을 덮는 바다의 배경에서 시작해서, 사실적인 디테일을 자랑하는 온갖 암초와 요새들이 하나씩 깔려나가고, 그 사이를 바람을 등에 업고 항해합니다. 적과 함포 사격을 주고 받으며 견제하다 힘겨운 꼬리물기 끝에 갑판전이 이어집니다. 힘겹게 갑판전을 승리하고 자축하는 것도 잠시, 좌현을 보니 거대한 바다괴물이 이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다가옵니다. 지친 선원들은 더 이상 싸울 힘이 없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체념하는 순간, 동료가 보낸 드래곤이 바다괴물을 향해 불길을 내뿜고 재로 만들어버립니다.

<1:4로 싸우면서도 주위 배를 전부 침몰시키는 무쌍도 드레드플릿에선 정말로 가능합니다.(양측 기함 한정)>

물론 매 순간이 이렇게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일단 이 모든 과정이 게임에서 구현이 가능합니다. 거기에 업계 최고인 GW의 조형기술이 더해져 모든 함선들은 엄청난 개성과 조형을 자랑하고, 박스에 동봉된 지형과 바다 배경 플레이매트의 퀄리티도 완벽합니다. 이 화려한 컴포넌트의 결합으로 인해 드레드플릿은 해상전의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게 구현해냅니다. 여기에 수려한 일러스트와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 설정까지 곁들이면 몰입도는 그냥 이미 바다 위에 배 타고 있는겁니다.

<도색이 된 함대가 선사하는 몰입감은 어마어마합니다.>

규칙 또한 해상전의 여러 요소들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는 점 또한 해상전 게임으로 엄청난 장점입니다. 모든 배는 함선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가해지는 관성 대문에 기동하는 데 제약이 있습니다. 드레드플릿에서 가장 중요한 페이즈인 이동 페이즈에도 이런 함선의 특성을 충실히 반영하여, 배의 무게에 따라 코너링의 능력이 다릅니다. 가볍고 빠른 배는 코너링이 뛰어나서 적의 시야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짤짤이 공격을 할 수 있는 반면, 대포가 많이 달린 크고 무거운 배는 사격 한번 한번이 크고 묵직하지만, 기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신중한 운영이 요구됩니다.

<배라기보다 성 근처에 배 파편을 긁어모아 바다에 띄운 섬급 규모의 블러디 리버의 경우 당연히 선회력이 떨어집니다.>

그 외에도 돛을 달고 있는 배의 경우 바람을 등지고 있으면 강제로 바람의 힘만큼 떠밀려 간다든가, (반대로 바람이 앞에 있으면 바람을 뚫고 가야 하기 때문에 덜 이동하게 됩니다.) 함포 사격은 상대방이 측현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든가, 함포 사격시 상대의 정면/후면을 향해 사격할 경우 대포알이 배의 주요기관을 뚫고 지나가는 raking fire로 인해 공격시 보너스가 주어진다든가, 등등 근대 함대전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정말 그럴듯하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이처럼 함대전을 꽤 충실히 구현한 덕분인지 과거 무적함대의 영광으로 인해 함대전이 크게 인기가 있는 스페인에서 드레드플릿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습니다.

판타지 세계의 여러 종족들의 공학기술을 한 자리에 볼 수 있는 것 또한 소소한 재미거리입니다. 드워프 함선의 경우에는 금속제련에 뛰어나다는 종특대로 느리지만 정말 단단한 철갑선을 운용합니다. 엘프 함선은 엘프처럼 빠르고 기동에 능한데다, 드래곤을 동료로 부리기 때문에 드래곤을 출격시키는 항공모함 역할을 합니다. 정령술사의 배는 정령이 뒤에서 바람을 불어줘서 더 빨리 이동하거나, 전투에서는 불의 정령이 나타나서 적의 배에 불을 붙입니다. 이 요소들이 함선의 미니어처와 디자인에 반영된 것에 그치지 않고 전부 게임상 룰에 구현이 되어 있다는 부분, 즉 모든 함선의 개성이 넘친다는 점 또한 이 게임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재도색 작업에 착수한 제 최애 배들인 엘프/드워프 함선>

반면 단점도 너무 명확한 게임입니다. 우선 현실적인 가장 큰 단점은 플레이 공간입니다. 가로 5피트, 세로 3피트의 공간을 차지하는 게임인데,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해상전 분위기가 나는건 좋지만 게임 공간이 넓어도 너무 넓습니다. 그래서 일반 카페에서 플레이하는건 꿈도 꿀 수 없고, 정말 테이블이 넓은 보드카페나 맞춤 제작한 테이블에서나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저는 집에 있는 바닥에서만 플레이하다 지난 주말 지인분의 맞춤 제작한 테이블에서 게임해봤는데, 게임의 몰입도와 퀄리티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바닥에서 플레이하는건 허리가 아파요. 왜냐하면..

<워해머 정규게임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큰 테이블이 필요합니다.>

게임의 두 번째 단점인 플레이타임입니다. 제작사측에서는 플레잉타임을 시나리오당 1시간 정도로 잡고 있는데, 이건 양측 모든 플레이어들이 룰을 완전히 숙달한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2:2 게임을 했을 때 지난 주말에 한 게임에 세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플레이하면서도 룰의 숙련도에 따라 플레잉 타임이 줄어들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이 게임의 제일 큰 단점입니다.

그 다음으로 지적되는 사항은 랜덤성입니다. 제일 문제가 심각한 것이 라운드가 시작할 때 각 플레이어는 무작위로 뽑는 "운명"이라는 카드인데, 이 카드의 능력폭이 너무 큽니다. 어떤 카드는 정말 강한 카드인 반면, 어떤 카드는 있으나 마나 수준입니다. 그러다보니 강한 카드를 뽑은 플레이어가 크게 유리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운명 카드는 한 명의 플레이어만 뽑고 효과는 전부 적용시키는 것이 사실상 전 세계 공통 하우스룰로 암묵적 적용되고 있습니다.

<저를 늘 괴롭게 하는 자객선..(어쌔신 쉽)>

그리고 카드의 종류가 너무 많다는 것 또한 단점으로 지적됩니다. 카드의 종류가 다양해서 다양한 효과가 있는 것은 좋은데, 너무 다양하다보니 어떤 카드가 나올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게임 횟수가 늘어나면 조금 더 숙달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숙달돼도 랜덤이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형이 정말 좋긴 하지만, 돛이나 깃발의 경우 가늘기 때문에 파손되기 쉽다는 점도 장식품이 아니라 게임용 미니어처라는 점에서 볼 때 엄연한 마이너스 요소입니다. 부득이 생길 수 있는 파손을 막기 위해 게임 도중 배를 이동할 때에는 가급적 돛보다 선체나 베이스를 잡고 움직이시길 권합니다. 여튼 약한 내구도는 운반을 어렵게 하는 요소인지라 저도 부득이 펠드허라는 회사에서 출시된 전용 폼트레이를 별도 구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추가 지출이 불가피합니다.>

가격은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사실 이 정도 디테일의 선박/지형/바다 매트를 70파운드(현재 환율 기준 약 11만원, 출시 당시 환율 기준 약 15만원)에 산다? 초딩때부터 GW를 추종했던 23년차 팬보이인 이 제가 판단하기로는 이건 정말 GW 답지 않은 엄청난 혜자 세트입니다. 하지만 보드게임 한 개가 10만원을 넘는다? 미니어처에 관심이 없는 보드게이머에게는 비싼 가격일 수 밖에 없지요.

이상으로 드레드플릿에 대해 간단히 살펴봤습니다. 대항해시대를 비롯한 함대전에, 특히 수 십개의 포가 불을 뿜는 함포 사격과 칼이 부딪치는 갑판전에 로망을 갖고 있는데, 아직까지 충족시켜주는 게임을 만나지 못하셨다면, 이 게임입니다. 하이 판타지 세계관을 좋아하는데, 지상전만 하는 것이 지겹다, 워크래프트처럼 배가 싸우는 것도 보드게임으로 해보고 싶다, 라고 하시면 이 게임입니다. 한 배에 총 대포 수 180개가 달린 미친 개성의 1:700 스케일의 범선 모델을 갖고 싶다. 하면 이 게임(?)입니다.

<이 장면을 기억하신다면, 드레드플릿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