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후기 : 목성 침공 1~11위

목성의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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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1 오후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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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목성의독서가입니다.
연말을 맞아 한 해를 정리하는 다양한 후기들을 감상하다가, 이 기회에 저의 한 해를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남겨 보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 태양계에 빗대자면 대략 목성처럼 음침하지만 동시에 묘한 매력을 풍기는 게임들을 주로 다루고자 합니다.
변변찮은 글이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입맛이 있구나 하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은 boardgamegeek.com에 공유된 이미지들을 가져왔습니다.

이전 순위는 이쪽에 있어요.
2019년의 후기 : 목성 침공 11~20위

10. 벼룩 파티 circus-flohcati + Penguin Party

처음 보는 제목 같지만 실은 벼룩 서커스로 즐기는 펭귄 파티입니다.

벼룩 서커스는 시스템 면에서 제가 좋아하는 게임이나, 2인플에 어울리지 않아서 데드맨스드로우에 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2016년판 벼룩 서커스의 강렬한 카드들을 보자면 어떻게든 이걸 섞어 보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싶어지지요.

뛰어야 벼룩이지, 어찌 답답한 상자에만 갇혀 있겠냐 싶기도 하고요.

이 때문에 올해는 벼룩 파티라는 혼종을 자주 플레이하곤 했습니다.

사실 파티라는 명목으로 귀여운 펭귄들을 7층 가까이 쌓는 펭귄 파티에는 동물 학대의 혐의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반면에 서커스로 몸을 단련한 벼룩들은 튼튼하고 유연해서 괜찮습니다.

집에 잠자고 있는 벼룩 서커스가 있다면 벼룩 파티도 한번 즐겨 보시길 권합니다.

생태친화적 게임 플레이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펭귄 파티는 펭귄 파티로 즐길 때 토큰 등이 갖추어져 있어서 가장 편하고 재미있습니다.)

9. 캠피 크리쳐스 Campy Creatures

B급 괴수 영화의 정서를 멋지게 녹여 낸 눈치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들은 각자 미치광이 과학자가 되어 인간들을 납치하기 위해 투명인간, 화성인, 킹콩 등등 10종의 괴수들을 하나씩 내보냅니다.

이때 바닥에 깔려 있는 인간들의 특성, 괴수의 능력, 과학자들끼리의 현재 서열에 따라 다양한 상호 작용이 일어나게 되지요.

인간을 납치하는 테마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나, 전체적인 미술 요소와 진행 방식 자체가 워낙 경쾌하기 때문에 누구나 부담 없이 내면의 암흑에 몸을 맡길 수 있습니다.

지난 할로윈에 아주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즐겼던 작품이에요.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 등장하지만 가장 숭고한 존재는 어시스턴트들입니다.

이들은 라운드가 넘어가도 제거되지 않고 계속 곁에 남아 점수를 제공하지요.

결국 이 게임은 단순한 납치와 경쟁뿐 아니라, 각박한 현대 사회의 음지 어딘가에서 오늘도 발로 뛰는 조력자의 책임감에 대해서 진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지 않나 싶습니다.

8. 카멜롯의 토너먼트 Tournament at Camelot

트릭테이킹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상은 대전 격투 게임입니다.

그것도 필살기와 초필살기, 분노 게이지와 스트라이커 시스템을 모두 갖춘 본격 격투 게임이에요.

각각의 캐릭터는 말도 안 되게 강력한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체력이 떨어지면 조력자가 난입해 능력을 더해 주며, 그것도 모자라 온갖 보조 능력을 덕지덕지 붙일 수 있거든요.

덕분에 초반에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맞으며 버티다가 기를 모아 일발 역전을 이루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연출됩니다.

저는 이 작품을 가득 채운 중세화의 매력이 너무 좋습니다.

그림 몇 개를 따오는 정도가 아니라, 박스부터 카드 뒷면까지 온갖 요소 하나하나를 통해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전달하고 있어요.

실제 게임에 필요한 텍스트보다, 아서왕 이야기의 인물과 배경, 소품 등에 대한 텍스트가 훨씬 많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일견 불필요한 요소들에 잔뜩 공을 들여 창작자는 무엇을 얻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 답은 아마도 ‘재미’이겠지요.

창작자의 재미가 언제나 플레이어의 재미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저는 게임 안에 무엇보다도 먼저 창작자의 재미가 담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그 재미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미래의 명작을 만나기 위한 투자일 수 있을 것 같아요.

7. 짜르의 밀사 Message to the Czar

굳게 닫힌 궁전의 문을 관료제 앞에 발가벗겨진 민원인의 마음으로 두드리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변방의 관리가 되어 짜르에게 비밀 편지를 부칩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너무도 광활하기에, 짜르의 성에 도착하려면 여러 명의 심부름꾼들이 번갈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하지요.

이 한심한 심부름꾼들은 남과 같은 여관을 쓰는 것도 싫어하며, 어지간히 사람이 넘쳐 압박을 받지 않는 다음 목적지로 떠나지도 않습니다.

겨우겨우 궁전 문 앞에 당도하면 문지기가 뇌물을 요구하지요.

단번에 큰돈을 쥐어 주면 좋겠지만, 꽝이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인지라 조심조심 뜸을 들여야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뒤에서는 또 다른 심부름꾼이 쫓아와서 다른 문으로 들어가려 하고……

짜르의 밀사는 한 편의 부조리극 같은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카프카의 단편 소설인 ‘황제의 전갈’과 ‘법 앞에서’를 섞어 놓은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색연필화로 완성된 게임 보드의 신비로운 분위기도 이러한 요소들에 멋지게 어우러집니다.

전반적인 게임 진행은 추상 전략의 성격이 강하지만, 텍스트 하나 없이도 문학적인 향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6. 깊은 계곡의 선술집 The Taverns of Tiefenthal

산기슭에서 2년 정도 작은 찻집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그 시절의 이런저런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에요.

선술집에 맥주와 자리를 마련하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맥주를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선술집을 보수해 더 많은 손님을 받아들이고……

처음에는 금화 한 푼이 귀하기 때문에 1원짜리 손님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번창할수록 단골손님은 눈엣가시가 되고 급기야 어떻게 하면 이들을 문전에서 쫓아낼까 고민하게 되지요.

아, 게임 이야기입니다. 제가 진짜로 그랬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주사위와 드로우 운에 휘둘리면서도 어떻게든 점수 뽑을 구석은 찾을 수 있는, 작가 특유의 작품 세계가 아기자기한 설정 안에 잘 버무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번 주점 곳곳을 리모델링한다거나 맥주와 금화 물량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게 다소 번거롭지만, 이 역시 정신없이 바쁜 점장님의 애환이라고 생각하면 외려 테마에 충실한 듯도 싶고요.

구입한 카드를 다음 차례에 바로 쓸 수 있고, 점수 카드에 해당하는 귀족을 덱에 넣더라도 순환이 꼬이지 않기 때문에 덱빌딩의 빡빡함은 덜한 편입니다.

대신 눈금 보정이 어려운 편이라 신중하게 주사위 드래프팅을 하지 않으면 운빨망겜이라고 (나만) 욕하는 순간이 몇 번씩 나오곤 합니다.

이 게임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선술집 그 자체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을 만큼 꼼꼼한 세부 요소로 가득해요.

선술집 보드는 조립식이고, 각 부분을 뒤집으면 향상된 선술집의 그림이 드러납니다.

여기에 각각의 카드들이 정해진 위치에 배치되면서 하룻밤 동안 손님과 종업원이 들고 나는 모습을 형상화하게 되지요.

게임에는 다섯 가지 모듈이 포함되는데, 사실 기능적으로 대단한 변화를 주는 요소들은 아닙니다.

작가는 그저 새로운 술 메뉴를 더해 보면 어떨까, 광대들이 라이브 공연을 하면 어떨까, 손님들이 방명록을 남기면 어떨까……

이처럼 진짜 점장님 같은 상상을 해 본 게 아닌가 싶어요.

좋은 선술집은 과도한 홍보가 필요 없는 법, 게임은 첫 번째 모듈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5.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게임의 배경은 산속에 자리 잡은 오래된 수도원입니다.

이곳에서는 얼마 전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은 내부의 수도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분명하지요.

플레이어는 각기 다른 수도사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플레이어의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차례에 카드를 활용해 원하는 수도사의 미플을 수도원 곳곳으로 옮길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해당 수도사는 혐의를 받거나 혹은 덜게 됩니다.

이렇게 카드를 쓸 때마다 정해진 시간이 흐르다가 마침내 하루가 다 가면 혐의는 단서 점수가 되면서 수도사들의 목을 점점 죄어 오지요.

매 게임마다 정해진 범인이 있는 클루 등과는 달리, 장미의 이름에는 정해진 범인이 없습니다.

대신 마지막 순간에 단서 점수가 가장 높은 수도사가 범인이 되지요.

결국 이 게임은 범인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만들어 내는 게임인 셈입니다.

바꿔 말해 무고한 동료를 화형대로 떠밀고서, 한두 걸음만 뒤떨어져 혀를 끌끌 차며 구경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겁니다.

특히 다른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수도사의 정체를 맞히면 상당한 단서 점수를 먹일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면서 다른 플레이어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게다가 게임 안에는 일종의 중립 수도사이자 탐정인 윌리엄과 그 수행원 아드소가 있는데, 이 무뢰배 같은 놈들이 옆에 붙으면 혐의나 단서 점수가 큰 폭으로 오르내리므로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집니다.

장미의 이름은 동명의 소설을 게임으로 옮긴 작품입니다.

원작이 워낙 다채로운 요소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그 가운데 수도원의 숨 막히는 폐쇄성만큼은 훌륭하게 게임 안에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움직일 수 있는 곳은 제한되어 있는데 어디를 가든 쫓아오는 집요한 시선들. 그리고 누군가 한 사람은 살인범으로 몰려 종교 재판정에 서게 되리라는 압박감.

큼직하지만 사방이 막힌 게임 보드와 눈 덮인 수도원의 풍경 등은 이렇듯 답답한 느낌을 훌륭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후반에 내 수도사가 범인으로 몰리면 정말이지 보드 밖으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예요.

4. 국립공원 PARKS

도보 여행자가 되어 사계절 동안 미국 곳곳의 국립공원들을 방문하는 게임입니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여행자들은 계절마다 점점 길어지는 여행길을 따라가며 자원을 얻거나 사진을 찍고 수통을 채우는 등의 행동을 수행합니다.

이때 남보다 앞서 나가면 기후 토큰을 추가로 얻을 수 있지만, 여행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눈치 싸움이 꽤 치열해집니다.

이렇게 여행길을 지나는 동안 필요한 자원들을 확보해 두면 여행길의 끝자락에서 국립공원을 방문하거나 여행 장비를 갖출 수 있습니다.

승리를 위한 점수는 주로 공원을 방문함으로써 얻을 수 있으나, 그 밖에도 비밀 목표를 완수하거나 사진을 많이 찍는 등의 방법도 존재해요.

처음에는 점수를 내기가 무척 까다로워 보이지만, 진행하다 보면 장비가 도움을 주고 여행길도 길어지기 때문에 점점 기회가 많아지지요.

저는 곰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표지에 그려진 곰 두 마리를 처음 본 순간 완전히 매혹당했어요.

게임은 59개 공원 포스터 연작 기획과 제휴하고 있으며, 곰 외에도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들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거북이도 나와요. 전 거북이도 좋습니다.

실제로 이 게임에 대한 관심은 주로 미술 요소에 집중되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게임성 자체도 취향에 잘 맞았습니다.

아주 평화로운 게임처럼 보이고 실제로 평화롭게 진행할 수도 있지만, 사실 자리 선점 요소가 있다 보니 상대한테 필요한 자원들만 쏙쏙 빼먹으면서 아주 지저분하게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거든요.

아름다운 카드 속 풍광뿐 아니라 상대의 인성도 감상할 수 있는 그런 게임입니다.

이렇듯 화사한 게임을 목성급으로 분류하기가 좀 애매하긴 합니다만, 국립공원의 구성품들은 지나칠 만큼 고퀄리티입니다. 너무 지나쳐서 변태적일 정도예요.

모든 구성물이 완벽하게 정리되는 기본 오거나이저, 에나멜 도료를 입힌 뱃지 모양의 선마커, 각기 다른 야생동물들을 형상화한 와일드 토큰, 역시 하나하나 그림이 모두 다른 사진 토큰.

이 때문에 죄다 똑같은 기능의 와일드 토큰이나 사진 토큰을 가져갈 때도 마음에 드는 걸 골라 집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제공하는 게임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아요.

3. 디스크 월드 : 앙크모포크 Discworld: Ankh-Morpork

디스크 월드는 본래 테리 프래쳇의 판타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설정을 가져온 게임이 몇 편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데, 앙크모포크는 거대한 거북 등딱지 위 도시에서 벌어지는 영향력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구성물이 꽤나 복잡해서 어려운 게임 같지만, 실제 플레이는 아주 단순해요.

가능한 만큼 카드를 사용하고, 카드 효과에 따라 보드 위의 상황을 재편한 후, 다시 카드를 보충하면 되거든요.

이 과정에서 자신의 비밀 목표를 가장 먼저 완수하면 게임에서 승리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평범한 작품입니다만……

문제는 게임의 배경이 되는 도시 앙크모포크가 희대의 막장 도시라는 점입니다.

설정에 따르면 디스크 월드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불결하고 가장 흥미로운 도시라지요.

여기서는 추종자끼리 접촉하는 순간 분쟁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암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듯 누군가 계속 죽어 나가야만 분쟁을 잠재우고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어요.

건물을 건설해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도 있으나 꽤 많은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신중해야 합니다.

가끔 마법을 잘못 사용하면 드래곤이 나타나거나 홍수가 일어나 추종자와 마을이 싹 쓸려 나가는 랜덤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자기 마을이 사라져도 한 푼 보상해 줄 사람이 없거든요.

때로는 다른 플레이어뿐 아니라 악마나 트롤 떼거리가 나타나 내 땅을 빼앗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게임은 시종 정신없이 진행되고, 그러다 보면 다른 플레이어의 의도를 잠시 까먹게 되고, 그러다 보면 깜짝 승리를 넘겨주게 되는 거지요.

게임 진행의 핵심은 100여 장에 이르는 플레이어 카드입니다.

이것들은 도시의 인물이나 장소를 담고 있는데, 모두 중복이 하나도 없이 각기 다른 내용과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사한 효과가 발생하더라도, 누구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서사가 분명하게 그려지지요.

이러한 서사적 즐거움은 원작 소설을 읽었는지 여부와는 무관합니다.

즉 원작의 커다란 설정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이 게임에서 생겨나는 서사는 오롯이 게임 자체의 힘이라는 뜻이지요.

이를 입증하듯 작가인 마틴 월리스는 올해 이 작품을 낸티내킹이라는 제목의 오리지널 설정으로 다시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2. 캔터베리로 가는 길 The Road to Canterbury

"동전이 헌금함에 쩽그렁 하는 순간, 영혼은 천국으로 직행한다."

이 게임은 면죄부 판매라는 역사적 설정을 가져온 화기애애한 작품입니다.

무덤에 발 하나를 걸친 순례자를 누가 더 잘 타락시켜 면죄부를 팔 것인가 하하호호 영향력 싸움을 벌이는 거지요.

각각의 순례자는 기질에 따라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를 약점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약점을 살살 자극하면 더욱 쉽게 타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순례자에게 면죄부를 팔면 누적된 죄악에 따라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지요.

그러나 죄악이 누적된 순례자는 면죄 여부와는 무관하게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죄악은 직접 권하는 편이 좋습니다. 종부성사를 주관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거든요.

게임의 진행 자체는 아주 단순합니다.

죄악 카드로는 죄를 권할 수 있고 면죄부 카드로는 죄를 사할 수 있어요.

적절한 순간에 이들을 사용하는 게 중요하므로, 결국 핸드 관리와 눈치 싸움이 주가 됩니다.

다만 점수를 얻는 요소가 다소 산만하게 흩어져 있어서,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면죄부만 실컷 팔고 재미는 못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더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금화 획득 방식은 좀 더 단순하게 다듬었어도 좋을 것 같아요.

하긴,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금화의 액수가 뭐 중요한가요.

한 명이라도 더 열심히 하늘나라로 보내드리는 게 중요하지.

게임의 제목과 배경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고, 미술 요소는 대부분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에서 따온 것들입니다.

그 자체로 훌륭한 원전들이지만 이들을 하나의 게임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내는 것은 다른 문제이겠지요.

다행히 이 게임은 테마와 미술 요소, 그리고 게임의 진행 방식이 훌륭하게 맞물린 사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의 느낌을 물씬 풍긴다는 점은 카멜롯의 토너먼트와도 비교할 만한데 이렇듯 다른 게임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어요.

1. 에메랄드빛 연구 A Study in Emerald

에메랄드빛 연구는 덱빌딩과 영향력, 경매, 액션 포인트, 마피아 게임의 요소 등등이 되는 대로 뒤섞인 혼란스러운 게임입니다.

셜록 홈스가 소설 속에서 활동한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게임 속의 세계는 크툴루 신화의 옛 존재들이 은밀히 다스리고 있지요.

플레이어는 이들에 맞서는 인류복권파, 또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충성파에 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각자의 정체를 숨긴 채, 각국의 도시들을 지배하고, 귀족들을 은폐하거나 암살하며, 세계에 혁명 혹은 전쟁의 불길을 불러와야만 합니다.

여기까지는 굵직한 전개일 뿐 실제 게임의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갓 발명된 다이너마이트를 귀족에게 던지고, 다른 요원을 추적해 암살하고, 뱀파이어가 되어 사람들을 깨물고, 좀비를 만들어 퍼뜨리고, 요그소토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크툴루를 소환해 도시 하나를 파괴하는 등 정신없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지요.

심지어 내가 조종하는 요원으로 귀족을 암살하려는데 알고 보니 그 요원이 간첩으로 밝혀지고, 간첩인 줄 알았는데 다시 이중간첩으로 밝혀지는, 뭐 이런 식의 막장 전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납니다.

즉 뭘 해야 나와 내 편한테 이득이 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아요.

게임의 종료 조건들도 다양해서 끝까지 물고 물리며 한 시간은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적당히 도시들만 나눠 먹을 경우 15분 안에 끝을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시스템으로만 보면 이 게임은 그냥 거대한 실험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 너무하다 싶었는지 2판이 나오면서 룰이 다소 간략해지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그 혼란함 자체에 있는 것 같습니다.

게임의 설정은 닐 게이먼의 단편 소설에서 가져왔는데, 원작은 ‘주홍빛 연구’를 살짝 꼬아서 셜록 홈스와 크툴루 신화를 섞어 놓은 기발한 이야기였습니다.

마틴 월리스는 여기에 19세기를 표현할 수 있는 온갖 문학적 + 미술적 인용들을 버무려서 하나의 작은 세계 규모로까지 게임을 키워 나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작가 스스로 룰북에서 언급하고 있듯, 이 세계를 세밀하게 조명하는 것은 진정한 역사를 쌓아 나갈 플레이어들의 몫입니다.

짧으면 짧은 대로 허무한 단편, 길면 긴 대로 거대한 장편 소설을 완성해 가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 게임은 흔히 말하는 스토리텔링 게임이 아님에도 매번 새로운 책을 펼치는 듯한 놀라운 즐거움을 줍니다.

여기까지 개인적인 2019년의 후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양가 없는 후기를 너무 두서없이 쓴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만, 연말을 기회로 다양한 취향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닌가 싶습니다.
매번 좋은 정보와 후기를 남겨 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연말 밤하늘의 별들처럼 다양한 작품들이 각자의 빛을 내길 빌어 봅니다.
마침 동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네요. 따뜻한 주말들 되시기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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