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의 후기 : 목성 침공 11~20위

목성의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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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7 오후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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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목성의독서가입니다.
연말을 맞아 한 해를 정리하는 다양한 후기들을 감상하다가, 이 기회에 저의 한 해를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남겨 봅니다.
이미 푸짐한 식탁처럼 좋은 후기들이 많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입맛이 있구나 생각하며 후식 정도로 곁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별도의 모임 없이 한두 명의 지인들과 게임을 즐기는 경우가 많아서 상대적으로 괴작에 도전하는 리스크가 적은 편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여러 명한테 욕을 먹는 것보다는 개별적인 자리에서 한두 명한테 욕을 먹고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쉬우니까요.
이처럼 뻔뻔한 마음으로 꿋꿋이 이상한 게임을 돌리다 보면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어쩐지 정이 가고 홀린 듯이 아끼게 되는 작품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결국 한 해를 돌아볼 때쯤에는 이 같은 작품들이 제일 먼저 생각나게 되더군요.
게임성만 보면 애매하지만 이상한 지점에서 나사가 풀렸다거나, 아무래도 등신 같은데 어쩐지 멋있다거나, 바라보기조차 끔찍한 혼종이라거나, 쓸데없는 부분만 고퀄리티인 게임들.
예컨대 보드게임의 세계를 태양계에 대입하자면 당연히 태양급은 아닌데 말짱한 지구나 그나마 무난한 화성은 내버려 두고 대략 목성처럼 음침한 곳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게임들.
이런 게임들 중에서도 올해 가장 인상적으로 즐긴 스무 개의 작품을 꼽아 보았습니다.
서럽게 욕만 먹어 왔던 목성급 게임들에 자기변호의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목성 침공이라는 부제를 붙여 볼게요.
사진은 대부분 boardgamegeek.com에 공유된 이미지들을 가져왔습니다.

20. 던전스 앤 드래곤즈 : 락페이퍼위저드 Dungeons & Dragons: Rock Paper Wizard

진지하게 몰입할수록 등신 같지만 멋있는 게임입니다. 기술명을 크게 외치면 파워도 2배가 되지요.

각각의 플레이어는 용의 동굴을 터는 마법사가 되어 최대한 동굴 깊숙이 들어가는 게 목표입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를 지정해 손동작으로 마법을 구사하는데, 발동 순서와 방향에 따라 반사나 폭발이 일어나 아주 정신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제목부터 가위바위보의 패러디이다 보니 전략성도 가위바위보 정도입니다만, 가위바위보에도 손목을 꺾어서 보면 상대의 패가 보인다는 전략 정도는 있으니까요.

큼직한 카드, 두툼한 보드, 혹시라도 못 알아볼까 정밀하게 묘사된 손동작, 캐릭터 카드와 스피드포션에 이르기까지 쓸데없이 공들인 요소로 가득한 게임입니다.

전 심지어 이걸 2인플로도 즐겨 봤어요.

19. 클론다이크 러시 Klondike Rush

설원에 광맥을 개척하며 털 많은 설인을 찾기도 하는 가슴 뛰는 테마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실상은 약간의 셋컬렉션 요소를 가미한 경매/주식 게임입니다.

초반에 적정가를 못 찾고서 너무 달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지만, 감만 잡으면 버티냐 지르느냐의 갈등을 시종 느낄 수 있지요.

그런데 게임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이렇게 갈등만 하다 보니까 전체적인 느낌은 꽤나 피곤합니다.

경매 방식도 단일하기 때문에 하우스룰로 조정하지 않으면 지루한 감이 있고요.

그럼에도 왜 이렇게까지 만들었는지 모를 3D 광산과 설인 컴포들은 눈을 즐겁게 합니다.

8분제국이나 어보브앤빌로우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 저는 이 게임을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습니다.

설인 좋잖아요. 발도 크고.

18. 칙우드 포레스트 Chickwood Forest

셔우드 숲의 로빈후드를 닭으로 패러디한 게임입니다.

표지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조류의 이미지가 독수리나 갈매기를 사랑하는 일부 야구팬한테 어필할 것 같군요. 네, 저한테도 어필했습니다.

게임 자체는 컬러레또 스타일의 재미난 변주입니다.

다양한 감점 조건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카드로 상대를 낚으면서 뒤집어 놓는 카드로 폭탄을 심는 거지요.

단순한 셋컬렉션만이 아니라 영향력 요소까지 가미했기 때문에 점수 계산은 다소 번잡한 편입니다.

사실 저는 컬러레또를 그 직관적인 룰 때문에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편인데, 하긴 이 게임이 그런 직관성까지 갖추었다면 컬러레또처럼 유명하지 여기서 저 같은 사람한테 칭찬을 듣고 있지는 않겠네요.

올해도 플레이해 줬으니 내년엔 야구 좀 잘하자 이 조류 놈들아.

17. 미스터리 러미 :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Mystery Rummy: Murders in the Rue Morgue

이 작품을 접하기 전에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미스터리 러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의 연장으로 나중에 와이어트어프가 나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럴 거면 와이어트어프처럼 검증된 게임을 하지 왜 이딴 걸 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2인플 최적화가 잘 되어 있고 저는 친구가 별로 없으며 애드거 앨런 포를 사랑하기까지 하거든요.

오랑우탄 카드 아래에 숨은 단서들이 쌓여 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추리 테마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약간. 아주 약간.

이래저래 개성이 약한 게임 같지만 마치 책처럼 열리는 박스가 이상할 만큼 고급스럽고 카드의 미술 요소도 수려합니다.

밤새 플레잉카드로 훌라를 돌리느라 젊은 날을 탕진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올해도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16. 디비나레 Divinare

사기꾼 점술가가 되어, 게임 시작 전에 버려진 카드의 종류별 개수를 최대한 근접하게 맞추는 게임입니다.

내 손 안의 카드를 한 장 공개할 때만 해당 카드에 대한 예측을 변경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핸드 관리와 낚시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게 됩니다.

실제로 플레이어가 점술가 노릇을 하는 셈이니 테마와의 결합이 절묘하고, 빈티지한 느낌의 미술 요소도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을 돌리고 나서는 같이 플레이한 친구에게 사과할 필요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가 신들린 촉으로 3점짜리 보석을 싹쓸이하기에 복권을 사 보라고 권했는데, 며칠 있다 결과를 물어보니 꽝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뒤로 연락이 잘 안 돼요. 절 피하는 걸까요?

15. 엔세스트리 Ancestree

누구 가문이 더 훌륭한지 허풍 떠는 과정을 타일 드래프팅으로 구현한 게임입니다.

얼마나 뼈대가 단단한지, 얼마나 부유한지,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를 기준으로 매 라운드 양 옆의 플레이어와 비교가 이루어지지요.

하나하나의 타일이 결정적인 건 아니라서 선택의 폭이 넓고 점수 계산도 직관적인 편입니다.

다음 수를 내다보며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여유롭지만, 취향에 따라서는 이런 여유가 너무 심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조상님들은 성별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쿨하게 결합하십니다.

자기와 똑같이 생긴 배우자를 만나 똑같이 생긴 자손을 낳는 나르시시스트도 계시지요.

이래저래 조상님 자랑에 말이 많아지는 테마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다만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없는 친구한테는 세븐원더스를 권하는 걸로.

14. 플릭엠업! : 데드 오브 윈터 Flick 'em Up!: Dead of Winter

그야말로 끔찍한 혼종이라는 말에 걸맞은 작품입니다.

데드 오브 윈터에서 좀비 테마, 그리고 비밀 목표와 크로스로드라는 요소를 차용한 플릭엠업이지요.

박스를 열면 온갖 쓰잘머리 없는 곳에 공력을 갈아 넣었다는 점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산탄총, 저격총, 야구방망이, 나이프 등의 무기들이 각기 구현되어 있으며, 진행 방식과 승리 조건이 각기 다른 9개의 시나리오가 있고, 묵직한 좀비 타워는 흉기로 쓸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게임에 돌입하면, 큰 알, 작은 알 번갈아 가며 주구장창 알만 까게 됩니다.

때로는 화려한 컴포들이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럼에도 이 작품은 바둑알에 이름을 붙여 주며 알까기를 즐기던 어린 시절의 세계를 너무도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어요.

번거로운 세팅과 단조로운 진행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어린이였던 한 사람으로서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느끼게 되는 작품입니다.

13. 크립트 Crypt

자식들을 등쳐먹은 아버지의 무덤을 탈탈 터는 폐륜 게임입니다.

남의 나라 선조들의 무덤을 터는 전형적 테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뒤틀린 쾌감이 있지요.

세련된 디자인의 주사위가 색색으로 들어 있어서 처음에는 이것만 챙겨도 본전이겠다 싶었는데, 게임 자체도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셋컬렉션을 위해 주사위로 배팅을 하고 그 수치를 넘기지 못하면 패널티를 받는데, 두세 개의 주사위를 결합한다거나 하는 요소가 빠른 속도감과 아주 잘 어우러져 있어요.

취향을 탈 만한 테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니라면 이런 기회에 소개할 일도 없겠지요.

그러게 왜 그러셨어요 아버님……

12. 마계촌 디럭스 Ghosts N' Goblins

1000원짜리 죨리게임이 흥하던 시절에 압도적인 가격과 볼륨의 디럭스 버전으로 등장했던 롤앤무브 게임입니다.

추억 속에만 남아 있던 작품이었는데 최근에 복각품을 구할 수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돌려 보았네요.

룰렛을 돌리고, 전진하고, 룰렛을 돌리고, 싸우고, 카드를 뽑고, 전진하고, 카드를 뽑고, 추락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 이런 식으로 전개됩니다만, 큼직한 보드 위에서 무섭게 생긴 몬스터들이 구역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동하는 걸 보고 있자면 그냥 오랜 친구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가끔 다른 사람의 플레이 경험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더 좋은 게임도 많은데 왜 굳이 그런 게임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즐거운 경험이란 얼마나 다채로운 요소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지.

새삼 편협한 태도를 반성해 봅니다.

11. 모던아트 : 카드 게임 Modern Art: The Card Game

경매 게임의 명작 모던아트에서 경매 요소만 쏙 빼 버린 오묘한 게임입니다.

그런데 경매의 압박이 없다는 점이 의외로 플레이어의 자존감을 높여 줍니다.

본판 모던아트에서는 빌빌거리며 화가의 눈치도 좀 봐야 하고 그렇다면, 여기서는 내가 딱 지명하는 순간 그 화가의 가치가 올라가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실제로는 카드로만 존재할 뿐인) 화가가 오히려 내 눈치를 보고, 내가 좀 존귀해진 것 같은 그런 정신 승리감이 듭니다.

이처럼 신예 작가들을 들었다 놓고서 저속한 농담을 곁들이며 즐기기 좋은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즈 갤러리도 판본만 다르지 동일한 게임이지만, 고흐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겸손해지니까 패스.

참고로 자신한테만 유리한 특수 카드가 존재하기 때문에 밸런스는 좋지 않습니다.

물론 밸런스까지 좋더라도 본판 모던아트의 아성을 위협할 일은 어차피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가 스스로 이 게임의 존재를 까먹지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되는대로 썼는데도 시간이 상당히 걸렸네요.
영양가 없는 내용뿐이지만 이렇게 시작했으니 10위에서 1위까지의 게임들에 대한 후기도 조만간 시간을 내어 완성하겠습니다.
양질의 후기를 써서 취향을 공유해 주시는 분들께 새삼 감사한 마음입니다.
연말 밤하늘의 별들처럼 다양한 작품들이 각자의 빛을 낼 수 있다면 좋겠네요.

다음 순위는 이쪽에 있어요.
2019년의 후기 : 목성 침공 10~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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