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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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22:51

https://boardgamegeek.com/boardgame/207063/donkey-derby

(보드라이프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아서, 보드게임긱 페이지 링크로 대신합니다.)

(1부(링크), 2부(링크), 3부(링크), 4부(링크)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백신의 정체는 사실 병균이다. 비활성화된 상태라 질병을 유발할 수는 없지만, 면역력을 키워줄 정도는 되는 병균.

필자가 생각하건데,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질주, 도박, 타인의 불행에 대한 쾌감과 같은 강력한 자극들에 대해, 백신과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게임은 바로 Donkey Derby이다.

동키 더비는 경마… 아니 경당나귀 게임이다. 말처럼 무섭게 질주하는 동물은 아니고, 적당한 정도의 속도감을 즐길 수 있는 당나귀 경주를 소재로 하고 있다. 중독될 정도의 질주를 하는 동물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게임의 본질은 경주가 아니라, 누가 더 빨리 골인점을 통과하는가를 예측하는 베팅이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돈으로 베팅하고, 이 돈을 다 잃거나 두 배로 돌려받는 게 아니고, 상대방보다 한 발 정도 먼저 예측하면 되는 정도의, 적당한 베팅에 적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게임이다. 몰래 장롱에서 누나 돈가방 꺼내들고 화투판으로 달려갈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 게임은 가볍고 빠르게 즐길 수 있다. 이번 판엔 꼴찌가 되었지만, 10분만 지나면 1등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나의 승리가 온전히 나의 실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렇기에 꼴찌라 해서 기 죽을 필요도, 1등이라고 해서 거만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타인의 불행이 10분 뒤 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마냥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분야의 게임 가운데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게임은 Royal Turf (Winner’s Circle)이다. 하지만, 베팅에 블러핑이 난무하고, “남자라면 얼 그레이!!”라고 외치는 이상한(?!) 사람들 덕분에, 작가가 의도한 것보다 더 심한 사행성을 띄게 되기도 한다. 게다가 찔끔찔끔 전진하던 얼 그레이가 단박에 폭풍질주를 하는 모습을 보면, 게임 도중 묘한 쾌감에 부르르 떠는 상황이 발생한다. 백신이라고 주사를 맞았는데, 앓아 눕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레이싱 게임과 베팅 게임이 존재하지만, 담백하게 본질을 표현하면서도, 지나친 자극을 주지는 않는, 말 그대로 백신같은 게임으로는 Donkey Derby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동키 더비 리뷰 보기(링크)

[덧붙이는 글]

필자가 오랫동안 기대해 마지 않았던 한 게임이 있다. 영국의 Royal Derby를 소재로 하는데, 필자가 너무나 흠모해 마지 않는 한 거장이 10년 넘게 다듬고 있다고 전해지는 게임이다. 만약 그 게임을 해보았다면, 이 글에서 추천하고 있는 게임은 아마도 Donkey Derby가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수년 전, 그 거장이 자주 찾는다는 런던 소재의 보드게임가게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필자가 찾아가기 며칠 전에, 그 거장께서 그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그 보드게임 가게에서 되찾아가셨다고 한다. 불과 며칠 차이로 그 게임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날린 것이다.

그래도 머지 않아서 출판이 되리라는 믿음을 안고서 아쉬움을 달랬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영영 달랠 수 없게 되었다.

18XX, Civilization의 아버지인 Francis Tresham은, 끝내 그 게임을 세상에 전해주지 않은 채, 2019년 10월 23일 우리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