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 정령섬 리뷰 : 좋은 게임이 주는 혼란스러움.

너굴너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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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3 오후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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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평소와 달리 게임 설명은 건너뛰고 곧바로 장점과 단점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스스로도 꽤 혼란스러운 느낌의 게임이라 게임 설명에 에너지를 쏟기 보단 감상 전달에 더 집중하고 싶거든요.

게임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현옹님의 글(http://boardlife.co.kr/bbs_detail.php?bbs_num=9740&tb=community_post&id=&delivery=0&pg=1&game_id=9071&start=&b_category=&game_category=)에 아주 잘 나와있습니다. 댓글과 함께 추천도 콕콕 남겨주세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정령섬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생각정리+퇴고의 반복으로 인한 정신력 고갈 때문에 원하는 내용의 절반 정도 밖에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다시 이 글을 업데이트 할 때 규칙 관련된 내용을 추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장점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볼까요?

1. 개성 강한 정령들

정령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잠시 컴퓨터 게임으로 시선을 돌려보죠.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4개의 게임. 리그오브레전드, 오버워치, 철권, 스트리트 파이터란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캐릭터가 떠오르나요?

저는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독가스를 뿜어내며 상대방의 진형을 뒤집어 놓는 신지드, 상대방을 얼렸다 녹였다 반복하며 비열함의 끝을 보여줄 수 있는 메이, 버튼을 마구 누르며 무자비한 무패턴 공격을 퍼붓는 에디. 파동승룡 스타일의 니가와 전략으로 상대를 ~~개빡치게~~ 화나게 만드는 가일이 떠오릅니다.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캐릭터만 고른 것 같다면 그건 기분탓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캐릭터들을 떠올리셨나요? 어떤 특징을 가진 캐릭터인진 모르겠지만 그 캐릭터들도 제가 선택한 캐릭터에 버금가는 강렬한 색과 매력을 가지고 있을거예요.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만들어진 정성 가득한 캐릭터겠죠.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정령섬도 마찬가지로 제각기 다른 성향과 매력을 가진 정령의 존재가 게임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의 차별화를 통해 게임의 재미와 리플레이성을 올리는 보드게임은 수 없이 많습니다. 지금 당장 이름을 대라고 하면 스무개 정돈 가뿐하게 언급할 수 있죠. 그럼에도 정령섬에서 이러한 매력을 특히나 강하게 느꼈어요.

저는 일러스트 / 능력과 특성 / 성장의 뛰어난 연계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게임 세팅하며 훑어보게 될 정령들의 수려한 일러스트는 단순한 눈요기를 위한 것이 아니더군요. 모든 정령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훑어 보는 것만으로 그림의 호불호를 떠나 정령들의 개성과 능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번개정령만 보아도, 온몸이 전기로 이루어진 새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번개를 내려쳐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은 압도적인 위용을 가지고 있죠.

이렇게 일러스트에서 간접적으로 느낀 힘은 게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플레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다한을 대동한 굳건한 수비력. 선공을 통한 압도적인 파괴력. 꾸준하게 인간을 괴롭히는 공포 등 정령만의 특징이 아주 잘 살아있어요. 게다가 게임이 진행될 수록 다른 정령과의 협업과 파워카드 보강을 통해 정령의 약점을 보완하거나 아예 강점을 극대화 하는 등 내 입맛대로 정령을 튜닝할 수 있습니다.

“나와 궁합이 맞는 정령과 호흡을 맞추며 더욱 강하게 성장한다.”

이런 느낌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 중 하나인 배틀콘 이후로 아주 오랜만인 것 같아요. 정령들의 개성이 강렬하지 않았다면 “나와 궁합이 맞는" 같은 소리는 꺼내지도 못하겠죠. 정령이 가진 다채로운 색깔과 그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점이. 그리고 그 매력이 다른 정령과 만나면 배가 된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인 게임이예요.

2.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질문들

정령섬의 진행은 정령의 성장 -> 인간과의 전투 -> 마무리라는 단순한 흐름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운드 준비 -> 해결 -> 마무리로 여느 협력게임과 다를 바 없죠. 하지만 각 라운드를 조심스레 살펴보면 단계별로 상당한 고민을 하게끔 잘 설계 되어 있단걸 느낄 수 있습니다.

초반부인 성장 단계를 보면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정령을 성장시킬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3가지 성장 방법 중 하나를 고르는데 국한되지 않고 현신을 어떻게 흩뿌려 영향력이 미치는 곳을 늘려야 하는가? 어느 타이밍에 사용한 힘을 다시 회수 할 것인가. 이번 라운드에 덮쳐올 습격에 어떻게 단기적/장기적인 대처를 할 것인가?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정령을 키워나가지 않아요. 선택 하나하나가 가진 의미도 중요하고 거기에서 오는 결과도 장기적으로 보면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인간을 상대로 맞서 싸우는 단계에선 또 다른 질문을 받게 됩니다.

선턴에 발동 되는 힘으로 인간의 세력을 약화 할 것인가? 어느 정도 피해를 입더라도 후턴을 노릴 것인가? 어떤 카드의 조합을 사용하여 정령의 추가 능력을 발동할 것인가? 공격 / 수비 중 어느 것에 치중하는가? 다른 정령과 협업 할 것인가? 그렇다면 공과 수의 역할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선공 후공 중 어느쪽에 힘을 둘 것인가? 무리한 행동으로 인해 다음 라운드에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닌가? 준비 단계보다 더 많은 질문을 받게 되죠. 초반부의 선택지가 결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면, 이번 단계서의 선택지는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게임의 승패 여부가 여기에서 갈리거든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부만 언급한 것일 뿐. 정령섬은 게임 내내 플레이어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쏟아지는 인간들과 질문의 홍수 속에서 최적의 답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지요. 이를 해결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동료들과 상의하며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고요.

질문의 폭은 넓으며 고민의 깊이는 깊습니다. 협력게임의 정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게임이 던지는 질문- 즉 상황을 어떻게 타개 하겠냐는 퍼즐적 요소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협력 게임을 즐겨왔지만 정령섬이 가진 그 질문- 즉 겹겹히 쌓이고 얽힌 퍼즐이 타 게임에 비해 더욱 두툼하고 어렵게 느껴져요. 단순에 보이는 게임 속에 존재하는 그 깊이감이 굉장히 좋습니다.

3. 실시간 단계 진행

대체로 협력게임은 고질적인 문제점을 하나 안고 있습니다. 알파게이밍. 즉, 숙련자가 초보자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며 다인플이지만 사실상 1명에게 모두가 끌려가는 문제가 필수적으로 존재합니다. 웬만한 협력게임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죠.

디자인 과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과감히 추측하건데, 정령섬은 아마 플레이 시간 단축을 위하여 실시간 액션 진행이란 규칙을 도입했을겁니다. 제 추측이 옳은가에 대한 여부를 떠나, 이 규칙이 알파게이밍의 문제를 크게 줄이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건 확실해요.

게임을 해보면 곧바로 느끼시겠지만, 모든 플레이어가 자기의 영역 / 카드 / 수를 챙기느라 머리 속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릴 겨를이 많지 않아요. 알파게이밍을 하려면 플레이어들의 선택지, 현재의 상황, 앞으로의 예측에 대한 정보가 머리 속에 있어야 하는데, 워낙 인간의 습격을 막느라 바쁘다보니 그럴 겨를이 없어 남의 플레이에 영향을 줄 틈이 없습니다.

물론 정령섬도 협력게임의 장르에 속하는 만큼 알파게이밍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원이 적을수록 서로의 행동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쉽거든요. 하지만 간섭의 정도가 타 게임에 비하면 확연히 적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해당 정령주에게 달렸거든요.

이후에 이야기 하겠지만 이러한 진행이 장점만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조직적인 움직임이 어렵다보니 게임의 체감 난이도는 더욱 상승하는 부작용이 있어요. 하지만 협력게임의 난이도는 합리적인 선 안에서 높을수록 좋으니 치명적은 단점은 아니라 봅니다. 오히려 플레이어들 모두에게 자유와 책임을 함께 나눠지게 함으로써 팀에 기여하는데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되려 커다란 장점이라 봅니다.

자, 그럼 정령섬의 단점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1. 살벌한 난이도

정령섬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일련의 단계를 통해 섬을 습격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움직임이 예측 가능합니다. 그러니 계획만 잘 세운다면 수비가 쉬울 것 같죠? 아하- 그런 말씀을 하시는 당신. 함께 정령섬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건 당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잘 막고 있는거 같은데?’ 라며 방심을 하는 순간. 그 한번의 안도감이 방어선에 균열을 만들고 인간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섬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틈을 비집고 들어온 적을 제압하지 못하는 순간 섬은 가차없이 잠식 당하기 시작하죠.

일반적으로 라운드마다 특정 지역만 몇 차례 때리는 협력게임과 달리, 정령섬은 침략 당하는 특정 종류의 영역에 인간의 흔적이 존재하는 한 피해를 받습니다. 잠시 방치 해놓은 인간 하나가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 남아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인간들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섬은 오염되기 시작하고, 정령들의 영향력은 점차 낮아지며, 인간들의 번식력은 눈에 띄도록 강해집니다.

팬데믹이나 기타 디펜스류 게임이 매 라운드마다 여러분의 뺨을 양손으로 짝짝! 두어 번 후려치는 느낌이라면, 정령섬은 천수관음께서 인간의 형태로 현세에 강림하시어 40개의 손으로 여러분의 뺨을 후려 갈겨대는 느낌입니다. 오염과 침략이으로 사방이 동시에 터져나가는 경험을 해본 분들이라면 따귀 40대를 동시에 맞는다는 표현에 수긍하실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잠깐 정신을 놓으면, 팀원과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바글바글 늘어나는 인간들에게 미친듯이 두들겨 맞고 나가 떨어져요. 죽을 각이 아니었는데 어? 하는 순간 게임에서 지는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게임이 진행될 수록 게임에서 승리하는 조건이 점점 완화되긴 하지만 이게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게임 초중반의 승리조건은 달성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바퀴벌레처럼 계속 퍼져나가는 인간을 보면 구역질(...) 이 날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난이도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도전으로 여긴다면 정령섬은 정복하기 어려운 재미난 협력게임이나, 반대로 이런 압박감과 빡빡한 운영에 납득하지 못한다면 타 게임에 비해 과하게 어려운데다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것을 챙겨야 하는 불합리하고 무거운 게임으로 다가옵니다. 살벌한 난이도의 스트레스 가득한 게임을 싫어한다면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2. 공동책임

정령섬 후기를 보면 ‘게이머를 위한 게임이다'는 평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평이 나오는 이유는 위에 언급한 3가지 장점 (다양한 정령, 깊은 질문, 실시간 턴 진행)이 한데 모여 플레이어를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정령이 게임에 등장한 것은 그만큼 서로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정령들과의 궁합, 연계, 조화를 생각하지 않은 채 나의 플레이에만 몰두하면 높은 확률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죠.

게임이 던지는 여러 질문도 마찬가지. 판단 미스가 누적되면 머지 않아 직접적인 피해로 돌아오기 때문에, 매 라운드마다 최선을 다하여 가장 적합한 수를 찾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영역을 통제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곧 이웃에게 번져나가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카드를 골라 사용할 수 있다보니 사람들과 충분히 의견 교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기껏 고른 궁합 좋은 정령과 파워카드가 비효율적으로 쓰이는 낭비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기 어렵다고 눈과 귀를 닫아버리면 팀의 패배로 이어지죠.

위에서 ‘알파게이밍이 없으니 개개인의 자유와 책임이 늘어서 재밌다'라고 평 했죠? 이 말을 고스란히 뒤집으면 모두에게 자유와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에 숙련자/초보자 상관없이 1인분의 몫을 해내야 한단 뜻이기도 합니다.

숙련자들이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정령을 어떻게 굴려야 하는지, 어떤 파워카드가 궁합이 잘 맞는지, 어떤 정령과 호흡이 잘 맞는지 체득했으니 괜찮지만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는 초보자들은 밀려오는 압박 속에서 쩔쩔 맬 수 밖에 없어요.다른 게임처럼 누군가의 알파게이밍을 기대하기도 어렵고요. 그렇기에 초보자들의 미숙함이 게임 패배의 주 원인이 되기 쉬운데, 이게 정령섬은 게이머를 위한 게임이라는 평이 나오는 주된 이유입니다. 즉, 진입장벽이 제법 된다는 거죠.

좀 전에 말했듯 이 벽을 넘는 순간 정령섬은 너무나 재밌는 협력게임으로 다가올 테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스트레스와 번거로움으로 다가온다면 정령섬에서 아무런 재미도 느끼지 못할 확률이 높아요. 절대 초보자들에게 친절한 게임은 아닙니다.

마무리 이야기로 리뷰를 매듭짓기 전에 한가지 이야기 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2019년 Top 100에서 정령섬의 순위가 100위 언저리 인 것을 보고 “정령섬 순위가 낮네요" 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더군요.

숫자에 속으시면 안돼요! 100위 정도 된다는 뜻은 100개 중에 꼴찌란 뜻이 아닙니다. 제가 즐긴 수백여개의 재밌던 게임 중에서 100위 안에 선택되었단 뜻이예요. 굉장한거죠. 그 정도로 저는 정령섬을 좋은 게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게임 = 호감을 느끼는 게임" 이란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Top100 에서도 순위가 올라갈진 모르겠다는 뉘앙스로 게임에 대한 평을 내렸죠.

단순히 정령섬에 대한 호평을 보고 게임 구입을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정령섬을 하며 느낀 것을 조금 더 공유해보려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듣고나신 다음에 구입하시는 것도 늦지 않으니 한번 더 생각해보세요.

보통 리뷰를 작성할 때 1회만 해봐도 어떤 느낌인지 바로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게임이 있는가 하면, 서너차례를 즐겨도 어떤 느낌인지 전혀 감이 안오는 게임도 있습니다. 이 차이는 대체로 게임의 깊이에서 오는데요. 정령섬은 완벽히 후자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정말 드물게 지뢰를 밟아서 내가 지금 한게 게임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 여러차례 다시 해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 게임을 즐겼을 땐 내 일만 챙기느라 바쁘다보니 “평가 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뭔가 있다" 라고 느꼈습니다. 리뷰를 작성하기엔 1차원적인 재미만 느낀 것 같아 게임 주인에게 며칠 뒤에 한번 더 해보고 싶다고 부탁했죠. 다시 한번 즐겼을 때 첫 게임에선 느끼지 못한 정령간의 궁합의 묘미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게임의 매력을 다 본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에게 또 부탁했고. 그렇게 부탁할 때마다 이전엔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계속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점점 게임을 넓게 보는 안목이 생기며 좀 더 깊은 내면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확신했죠. 정령섬은 좋은 게임이라고.

그러나 저와 100% 맞는 취향저격 게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거 같아요.

정령섬은 다른 협력 게임에 비해 플레이 타임이 긴 편입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보내줄 수 있는 동료 또한 있기에 장시간 함께 웃으며 게임을 즐길 순 있으나, 게임이 가져오는 압박감의 농도가 타 게임에 비하면 상당히 짙은 편에 속하더군요.

협력게임을 캐쥬얼 vs 헤비라는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면 제 성향은 캐쥬얼 쪽에 속하는 편입니다. 조금 더 즐겁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더 추구하죠. 팬데믹이나 반지의 제왕 협력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시겠네요.

그런 점에서 쉴새없는 인간의 침공을 받아내야 하는 정령섬은 무게감 있는 축에 속합니다. 팬데믹이나 기타 협력게임은 ‘한번 더 해볼까?’ 라는 말이 쉽게 나왔지만 정령섬은 게임을 한 번 하고나면 지쳐버릴 정도로 온 힘을 쏟아내야 했어요.

이렇다보니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며 저와 궁합이 잘 맞는 서너가지 정령에게만 애착을 가지는 단점 아닌 단점도 생기더군요. 게임을 즐기려면 다른 정령도 해보고 장단점을 피부로 느끼며 다양한 각도에서 게임을 바라봐야 하는데,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제 플레이는 언제나 인간들을 때려부수는 공격형에만 치중 되어 있었어요. 어떤 게임이든 “죽기 전에 죽인다"는 간단한 논리를 좋아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제 스스로의 운영 폭을 제한하고 있어요.

그리고 정령섬이 매 라운드마다 안겨주는 고통은 인간을 제압하고 있는게 아니라 그저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는 인상을 계속 안겨주었습니다. 파괴적인 성향의 정령 위주로 게임을 즐겼음에도 능동적으로 백신을 개발하고 반지를 파괴하는 위 두 작품과는 달리 간신히 방어선을 펼쳐가며 수비에만 급급하다는 인상을 계속 받았어요. 제가 즐긴 게임이 악운에 악운이 겹쳐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능동적 협력이 아닌 수동적 협력의 느낌이 다소 컸습니다.

이렇게 정령섬이 좋은 게임인걸 분명히 알면서도 생각치도 못했던 요소들 때문에 정령섬이 내게 맞는 게임인지 확신을 가지고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령섬이 내게 맞지 않는다 라고 평가하신 많은 분들의 후기를 살펴보세요. 정령섬이 잘 만들어진 게임이란 것에 부정하진 못하면서도 저처럼 1~2개 어긋나는 요소 때문에 좋아하는 게임이라고 말하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거예요. 좋은 게임 =/= 좋아하는 게임인거죠.

평소라면 강추예요! 같은 말을 하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을텐데 이번만큼은 저 역시 뛰어난 게임 vs 안맞는 게임이란 애매한 경계에 놓인 채 어떤 의견을 드려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시간, 장소, 인원, 도전정신, 보드게임 경험 등 다양한 환경이 여러분을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다면 정령섬을 해보세요. 분명히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실겁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의구심을 가지신다면 일단 다른 기회를 통해 정령섬을 해보시고 구입 결정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전 규칙을 보았을 때 인간들의 침략 방식 부분을 읽으며 "한번 꼬이면 압박감이 너무 심하겠는데..." 라는 우려를 가졌는데, 실제로 그 부분 때문에 뛰어난 게임인건 동의하면서도 정령섬을 구입하진 않아도 되겠단 생각을 했거든요.

정령섬 처럼 좋은 게임성을 인정하면서도 취향 때문에 눈을 돌리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라 여러모로 말이 많았네요.

충분히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한 것의 절반도 풀어내지 못한거 같아요. A4 사이즈로 서너 페이지 정도는 더 할애하여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습니다. 공포가 가져오는 변화. 정령들을 지켜주는 귀여운 버섯모양의 다한. 추가 액션이 가져오는 전략의 변화 등 언급하고 싶은게 한 두개가 아니지만... 그랬다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너무 지칠거 같아 일단은 이만 줄여야겠죠.

끙… 진짜 괜찮다고 생각한 게임이라서 그런걸까요. '나랑 뭔가 안맞아' 라고 어느정도 결론을 내렸으면서도 손을 떼는게 아쉽네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글로 좀 더 생각을 나눠보고 싶어요.

지금 당장 손을 떼는건 너무 아쉬우니 빠른 시일 내에 한번만 더 해보자고 친구에게 졸라봐야 겠습니다.

그래도 한동안 좋은 게임 vs 안맞는 게임 사이에서 계속 방황하며 정령섬을 재방문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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