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잡설

쉐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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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17 오전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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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화

왓슨 앤 홈즈의 한글화는 제가 한글화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웃긴 작업이었어요. 뭐랄까. 남들이 하라고 번역한 게임이랄까요.

영어 실력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원문을 바로 읽으면서 게임을 즐길 수준까진 못 됩니다. 그래서 왓슨 앤 홈즈는 게임을 전혀 하지 않고 사자마자 바로 한글화를 했어요. 우리 모임 사람들이 재미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한 작업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보드게임이라는 게 나 혼자 놀려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 첫 번역으로 잘못된 게 있는 걸 우리 모임 사람들이 즐기고 나면 완성판을 만들어서 배포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과 다시 더 즐기지도 못하는데 말입니다. (타임 스토리즈 같은 게임의 한글화 자료를 만들어 주시는 분들에게 경배를...)

아까워서는 아니고(...... 10%?), 제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이 게임 한글화 자료를 공개하고 난 이후로 고맙다는 쪽지를 서너 통이나 받았거든요. 살면서 남한테 고맙다는 말 듣기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게 좀 중독성이 있습니다.

2. 법과 정서

한글화와 핸드메이드에 관련해서는 그간 보드라이프에서 말들이 많았었죠. 당시에 저는 제 엉성한 작업물 따위를 누구한테 공개하겠나 싶은 수치심으로 혼자 만들고 가지고 놀던 터라 약간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으로 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네요. 제가 공개한 자료들이 하나둘이 아니니...... ㅎ 게다가 디자이너의 허락을 받지도 않았고요. 때마침 하코온나에 관련해서 묘묘님께서 좋은 글을 올려 주셨네요.

한글화 자료를 ‘배포하는’ 사람으로서의 마인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을 즐겼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더불어 감사의 뜻입니다(+고생해서 만든 게 아깝다 10%......). 감사라는 건 뭐냐면, 제가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한글화 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에서 그 분들이 즐길 만한 게임의 한글화 자료를 제가 만들어보는 거죠. 그래서 사실 한글화 자료를 배포해주셨던 분들이 제 자료에 고맙다는 댓글을 남기는 걸 보았을 때에 느끼는 기쁨이 한층 더 크기도 합니다.

그런 부분이 있다 보니, 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언제라도 한글화 자료를 철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코온나 같이 국내 퍼블리싱 문제가 걸려 있게 된다면 즉각 내릴 소지가 있습니다(하지만 엘더 사인과 확장들은 절대로 국내에 정발되지 않겠지......). 한때 저작권 문제로 말도 안 되게 고소장도 받아본 적이 있다 보니 사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예민합니다. 그러나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습니다(어차피 내가 즐기려고 만든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는 순간 모든 것이 번거로워지더라구요...). 그게 제가 불법이라고 할 만한 영역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최소한의 양심으로, 핸드메이드가 가능하겠다 싶은 자료는 비번을 걸어서 공개하는 편입니다.(이노베이션 신판이나 아컴 카드 게임 같은 경우...) 왓슨 앤 홈즈는 좀 이례적인 편인데, 리플레이성이 0이다 보니 그냥 제 자료만 가지고 소설 읽듯이 즐길 사람들도 없잖아 있을 듯합니다. 진작 비번을 걸었어야 했는데, 장소 카드가 각각 어디인지 모르고 다른 보드게임 컴포넌트가 없으니 핸메를 한들 반쪽짜리라는 좀 단순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핸드메이드를 한 게 몇 번 있습니다. 한글화 자료를 공개하기 전에요. 그 중 한 건은 핸드메이드 버전만 가지고 있고 실제 제품을 사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죄책감이 좀 있습니다. 사실 해보니까 느끼는 건데, 핸드메이드는 정품보다 퀄리티가 좋은 적이 없더라구요. 저 단 한 건을 제외하고요.(아컴 호러 테마로 만든 러브레터였습니다;;;; ㅎ)

그래서 핸드메이드에 대해서 반대하느냐고요? 네. 당연합니다. 법적인 측면 이상으로 정서적인 측면에서 그러합니다. 적어도 저도 글을 쓰는 사람인 만큼, 내가 창작한 것에 대한 정당한 권리는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게 있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리는 상품의 판매로 입증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글화는 판매를 촉진시키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왓슨 앤 홈즈가 제 한글화 자료가 만들어지고 나서 엠 본부에서 빠르게 품절되는 것을 흡족한 심정으로 바라본 경험이 있어서...) 핸드메이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한글화는 ‘그 디자이너의 게임을 즐기는 것’인데, 핸드메이드는 ‘그 디자이너의 게임 아이템을 빼앗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반대합니다.

네, 빨리 러브레터 구매하겠습니다;;; ㅎ (요 다음 번에 엠 본부든 비마켓이든 제가 사고 싶어하는 게임이 같이 들어와서 배송비 절감이 되는 날...... 하하......)

3. 사람을 가려서 받습니다

모임을 한다면 사람을 가려서 받는 편입니다. 어떤 이상한 사람들처럼 성별 따위로 가려 받진 않고요. 아침에 목욕할 때 거울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남의 외모로 가려가며 받을 형편도 전혀 못 됩니다. ㅎ 아 뭐 제가 잘 생겼으면 얼굴 가려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니고요.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네.

보드게임이라는 게, 사람의 성향을 타잖아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모임에 온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더라고요. 룰 설명할 때는 듣지 않고 그냥 시작하자고 하더니 게임 시작하고 나서 엉망으로 하는 사람...... 그리고 보드게임 할 때 자기 턴이 끝나면 폰게임 하는 사람들. 게임 돌아가는 상황에 집중하지 않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의 진득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게 느껴진달까요. 그러려면 보드게임을 하지 말고 디지털 게임을 하셔야죠, 라는 게 제 생각이라.

저희 모임은 제가 지금 서른여덟인데, 제가 서른 중반일 때에 초등학교 6학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스물 하나부터 스물 여덟 아홉까지 다채롭습니다. 나이는 상관이 없는데, 즐기려는 마음이 없거나 사람과 만나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안 받습니다. 뭐 제 가치관입니다만, 세상에는 귀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으니 그 사람들만 챙기기에도 버겁더라고요.

4. 보드게이머들은 참 독특해요.

어떤 취미에 몰입한 사람들, 그래서 집단을 형성한 사람들에게는 묘한 특징이 있다고 하더군요. 자신들만이 그것을 즐긴다는 점을 선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굳이 이해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거. 모든 취미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닌데, 나름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보드게이머들은 달라요. 이 사람들은 취미 배포에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ㅎ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보드게임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즐기는 게임이 아니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야 더 재미있게 즐기는 게 보드게임이다 보니, 이렇게 사람들과 친화적인 취미가 또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이, 특히 게시판을 보면서 느끼는 건데, 참으로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요. 사실 다른 어떤 게시판들에 비해서 보드게이머 커뮤니티의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토론이나 논쟁에서는 사람들이 ‘내 생각은 이러하다’의 태도부터 시작해서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가 정말로 많습니다(게시판 경험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언론사의 뉴스 게시판이나 페북에서의 논쟁들만 봐도 뭐...)

저는 이게 보드게이머의 특징과 굉장히 밀접하다고 생각해요. 보드게이머란 어떤 사람들이냐면, 게임을 하면서 룰이 충돌할 때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다른 사람에게 룰에 대해 설명을 해 주고 심지어는 각자가 커스텀 룰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규칙을 지켜야 게임이 끝까지 잘 이어지니까, 마치 규칙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보입니다. 논쟁이 있다가도 누군가가 한 쪽의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제대로 된 사과를 하면, ‘수고하셨습니다 즐거운 보드게임 라이프 되세요’라는 반응이 곧바로 올라온다는 거죠. 마치 상대가 이제 규칙을 다 이해하게 되었으니 다시 게임을 재개한다는 것처럼. 제 눈엔 이런 보드게이머들의 기질이 정말 매력적으로 보여요. ㅎ

5.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요즘에 사실 저는 회사일과 보드게임 모임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의 80%를 보드게임 한글화에 다 쏟아붓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 디센트 2판 앱의 한글화 작업을 하고 있고요.(여러 능력자분들이 같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응원 한 번 보내어 주세요!! ㅎㅎㅎ) 패스파인더 의인의 분노가 지금 저의 다음 프로젝트입니다. 그 앞까지 물휴지님의 패스파인더 한글화 자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이제 의인의 분노 사이클이 엠본부에서 품절 나나 안 나나 지켜보겠......)

원래 엘드리치 호러 드림랜드 확장을 한글화하려고 했는데 그 사이에 패스파인더가 꽂혀 버렸네요. 패스파인더는 알고 봤더니 파이조 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에 패스파인더 카드게임을 계속 즐길 수 있는 시나리오집을 PDF로 판매하는 게 또 있습니다...(파이조 네 이놈들! 이 FFG 같은 놈들!) 몇 개는 무료로 공개해 놓은 것도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한 번 들어가서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한글화 하시는 분들 심정이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한글화 하고 싶은 게임이 계속 늘어나거든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플스 게임 A를 클리어해야지 하고있는데 그 사이에 게임 B랑 C가 나와서 그거 먼저 하게 되는 심정?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저의 룸메이트에게 이야기했죠(저는 주거공동체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연애를 안 해서 그런 거 같아. 연애했으면 이렇게 취미생활에 미쳐 살지 못했을 거야.” 뭐 당연히, 룸메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때 그런 생각을 조금 꺾기도 했죠. 누군가가 정말로 좋아졌는데 그 사람이 보드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는 보드게임을 버리겠다고. 요즘은 아리까리합니다. 느낌 가는 대로 하자 쪽이긴 한데, 한글화하고 싶은 게 워낙 많다 보니 요즘에는 그냥 ‘연애를 안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쪽으로 가고 있어서 뭐... ㅎ

6. 결론

그래서 다음 한글화 목표는 패스파인더 : 의인의 분노입니다. 시스템이 너무 마음에 들고, 시나리오 번역을 끝냈는데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대충 훑어 봤을 때의 느낌 자체로는 해골과 쇠고랑에서 난이도가 더 올라간 것 같아요. 해골과 쇠고랑을 빨리 완주해야겠어요. 그런 다음에는 엘드리치 호러 확장들의 한글화가 제 야망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 싶은 다른 게임들의 한글화는 다른 능력자분들에게 부탁을...... 깔깔.

7. 웃자고 내리는 결론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은 그저 피곤한 게 싫네요. 그냥 재미있는 것만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그러니 저를 가져가시는 분은 플스 4와 소프트와 300여 장의 DVD와 제 보드게임 200여 개와 한글화 능력을 같이 가져가시는 겁니......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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