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경찰과 범인의 숨막히는 추격전, 화이트홀 미스테리

개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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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오후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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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whitehall mystery

▲당시 화이트홀 미스테리를 표현한 삽화.

1888년 10월 2일, 지금은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수도권 경찰의 새 본부 건설 현장에서 한 인부가 사람의 시신 일부가 들어있는 꾸러미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토막 시체를 조사한 결과, 같은 해 9월 11일 템즈강에서 발견된 오른쪽 팔 부분의 시신 조각과(당시에는 의대생의 장난이라고 발표했었던) 일치한다는걸 발견하게 되죠.
신문은 화이트채플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살인마인 "잭 더 리퍼"와의 연관성을 물어왔지만, 수도권 경찰은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일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후에, 제스퍼 워닝 이라는 기자는 스피츠버겐 개를 활용한 조사를 통해 건설현장 근처에 묻힌 왼쪽 다리부분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체의 나머지 부분은 발견되지 않았고, 시신의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경찰서 서랍의 파일속에 고이 잠들게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유명한 그 사건, 화이트홀 미스테리 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 할 화이트홀 미스테리라는 동명의 보드게임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기도 하죠.

1. 어떤 게임가?
2011년 판타지플라이트게임 사에서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Whitechapel 라는 게임을 발매합니다.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는 딱히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름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잭 더 리퍼의 사건을 토대로 만든 게임입니다.
한 명의 플레이어가 살인자인 잭 더 리퍼를 맡고, 나머지 플레이어가 영국의 경찰을 맡아서 게임을 진행하게 되며

잭은 경찰을 피해 희생자를 처치하고 은신처로 돌아오는 것을, 경찰은 4일째 밤이 지나기 전 잭 더 리퍼를 검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대칭 게임입니다.

이미 1983년에 <스코틀랜드 야드> 라는 비밀이동 시스템을 차용한 도둑잡기 게임이 있었지만 더 무거운 테마와 그에 걸맞는 아트웤, 보완된 시스템 등을 무기삼아
발매되던 그 해 보드게임긱 골든 게임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죠. 이 화이트홀 미스테리라는 게임은 이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의 형제 게임입니다.

▲딱봐도 형제게임임을 알 수 있는 박스 일러스트.

화이트홀 미스테리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범인을, 1~3명의 플레이어가 경찰을 맡아서 플레이하는 비대칭 게임입니다.
범인은 이미 한 명의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자신의 범죄를 영원히 감추기 위해 제한시간이 다 되기 전까지 게임을 시작할 때 정해둔 각 지점에 시체의 조각을 매장해야 합니다.
반대로 경찰은 살인자가 이 사건을 어둠속에 묻어버리기 전에 범인을 검거해야 하죠.

범인은 보드 위에서 자신의 미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가림막을 앞에 두고 가림막 뒤에서 자신의 이동경로를 이동 시트에 기록합니다.
범인이 한 차례 이동하면, 경찰들은 범인이 어디로 갔을까를 의논해 0~2칸까지 이동 후 자신이 있는 칸과 인접한 숫자칸에서 단서를 찾거나 (질문 : 이 곳에 범인의 흔적이 있나요?)

단서를 찾는 대신 범인 검거를 시도합니다.(질문 : 이 칸에 범인이 있나요?)
이러한 단계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다가 범인이 최초 정해두었던 네 구역 중 한 구역으로 이동을 마쳤다면 경찰의 턴 후 "시체를 XXX번에 묻었습니다." 라고 공개를 하고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게 됩니다.

범인이 묻어야 할 시체는 총 네 조각. 시작할 때 한 조각을 묻으니 경찰, 범인에게는 3라운드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동안 각자의 특수능력들을 활용해 승리조건을 달성하면 되는 문제죠.

범인이 경찰을 뛰어넘을 수 없다거나, 뭐 여차여차한 잔룰은 있지만 규칙의 토대는 이게 거의 다 입니다. 생각보다 간단한 게임이에요.

▲범인의 미플이 보드 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림막 뒤에서 범인만 알고있다는게 이 게임의 특징입니다.

화이트홀 미스테리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그 비대칭성에 있습니다. 같은 사람과 플레이를 할 때라도 어느 진영을 맡느냐에 따라 느끼는 재미가 꽤 달라요.
이 게임에서 범인은 자신의 이동경로를 경찰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경찰의 수사 질문에 대답을 할 뿐이죠. 이 마저도 경찰이 헛다리를 짚으면 아무 정보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범인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얼핏 보면 일방적으로 범인이 경찰을 농락하는 게임이라고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해보면 잭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후술하겠지만 화이트홀의 특징인 중간중간 잭의 위치가 공개된다는 부분 때문이죠.

생각보다 맵이 좁고, 어디론가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지날 수 밖에 없는 길의 후보를 좁히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범인을 맡은 플레이어는 중간중간 "갈 곳이 없네?" 라는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반대로 경찰 입장에서는 옭아매는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즉 범인을 플레이한다면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치는 재미를, 경찰을 플레이하신다면 범인의 이동경로를 그리고 봉쇄해서 옭아매는 플레이를 온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룰에 이정도의 비대칭성을 부여한다는 시점에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게임이 되지요.

2. 화이트채플과의 차별점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를 해본 유저라면 위 항목을 읽고 화이트채플과 별 차이가 없음을 느끼실겁니다. 저 역시 그랬고요.
하지만 플레이해보면 두 게임은 사뭇 다른 느낌으로 흘러간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라면 역시 게임 진행 방법이 있을 수 있겠네요.
화이트채플의 경우 범인 역할인 잭을 맡은 플레이어는 4번의 라운드동안 매 라운드별로 정해진 후보중 한 군데에서 시작해서 15턴 이내에 게임 시작시 정한 은신처로 들어와야 합니다.
화이트홀의 경우 범인 역할을 맡은 플레이어는 시작시 정한 4개의 매장 장소 중 하나에서 시작해서 15턴 이내에 다른 장소로 이동, 4개의 장소를 3라운드동안 다 찍어야 합니다.

얼핏 보면 별 차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직접 플레이해보면 얼마나 큰 차이인지 금방 실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로 안전하게 도착하는 순간 해당 후보지, 즉 도착한 지점(이자 동시에 현재 지점)을 경찰에게 통보해야 한다는 점, 후보지는 지도를 4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각 구역별로 하나씩 정해야 한다는 점.

이 두가지 때문입니다.

▲ 생각보다 경찰의 수사망은 급격하고 쫀쫀하게 조여듭니다.

경찰이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은 한, 범인과 2~4턴 차이로 범인을 쫓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적어도 어느 구역에 상대가 위치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상술했듯 맵 자체가 화이트채플에 비해 좁다 보니 각 구역의 면적도 생각보다 좁고, 3번째 매장지를 찍을 무렵에는 (적어도 실력이 비슷하다는 가정 하에는) 한두칸 사이의 간격을 두고 매장지를 찍게 됩니다.
그 다음은 뻔하죠.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는 두 칸 앞의 경찰, 심지어 자신이 가야 할 마지막 구역으로 향하는 방향을 막고있는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야 하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화이트채플이 경찰이 유리하다 라는 의견이 많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화이트채플의 특수성때문인데요, 화이트채플은 라운드가 연속적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잭이 은신처에 들어가는 순간 라운드가 종료되며, 다음 라운드에 잭은 현재 위치가 아니라 새로운 희생자가 위치한 칸에서 라운드를 시작하게 됩니다.
다시말해 경찰이 열심히 잭을 쫓아봤자 잡지 못하면 결국 멀리 떨어진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는 경찰에게 매우 큰 페널티에요. 게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말이죠.
물론 경찰 플레이어들이 아예 휘둘리지만은 않도록 게임 내에서 여러가지 장치(경찰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거나 희생자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거나)를 마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경찰 말이 다섯개나 되지만 잡지 못할 때를 대비해서 몇몇 경찰은 추격의 고삐를 느슨히 하고 다음 라운드를 대비해야 하기도 하고요.
아, 물론 둘 다 극의에 이른 플레이어라면 경찰이 조금 유리하다는 것은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게임이 그정도까지 반복하면서 플레이해도 재밌을 정도로 리플레이성이 뛰어나다거나 뭐 그런건 아니거든요. (적어도 저한테는 말이죠)

반면에 화이트홀은 그런 부분을 거의 말끔히 해결했습니다. 라운드 전체가 죽 연속되어서 구성하고 갑자기 점프를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연속된 추격극을 펼칠 수 있어요.
이 과정에서 경찰이 일방적으로 헤매는 경우가 확실히 줄어듭니다. 특히나 마지막 라운드쯤 되면 가야할 곳, 갈 곳 두 구역이 확정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거의 꼬리를 잡을듯 말듯한 상태가 이어지죠.
범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은신처까지 스플린트로 달려가면 그 이후 다시 숨통이 트이는 화이트채플과 달리 화이트홀은 숨통이 트이는 일이 없습니다.

규칙은 더 이상 범인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직접 살 길을 찾아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당장 도망치는 것 보다는 도망친 후의 라운드 시작을 고려하는 플레이가 요구됩니다.

더불어 화이트채플에 비해 경찰이 처리해야 할 정보가 압도적으로 적습니다. 4라운드동안 한 은신처로 들어가야하는 화이트채플은 전 라운드의 이동경로 또한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하지만 화이트홀은 못잡았다면 그 전까지의 이동경로는 싹 잊어도 됩니다. 언제나 필요한건 지금 잭이 어디있고, 앞으로 가야하는 지역은 어디인가. 이거 두개거든요.
이부분이 숙련된 플레이어들의 경우 잭이 불리하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많은 플레이를 해 본 것은 아니라서요.

아, 반대로 화이트채플에서 경찰을 잡고 잭의 이동경로를 차분히 정리해가면서 은신처를 좁혀나가고, 이를 통해 최후에 은신처 주변에서 지키고 있다가 잡았다 요놈 플레이를 하시는 걸 즐겨하시던 분이라면 화이트홀의 이런 부분은 단점이 될 수도 있네요.

▲기존의 화이트채플의 마차이동, 등불이동은 물론 보트 이동이라는 새로운 수단이 ~~(경찰에게도)~~ 생겼습니다.

그 밖에 강의 추가로 인한 배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점, 경찰에게 게임중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능력이 생겼다는 점 등의 소소한 변경점도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라운드가 3개로 줄어들었고, 잭의 입장에서 수사망이 꽤 빡빡하게 조여오는 느낌이다 보니 여섯 번의 특수이동은 가뭄의 단비같은 느낌이며, 아낄 필요도 없이 이때다 싶은 순간 팍팍 쓰게 됩니다.
이러한 부분 역시 화이트채플에 비해 조금 더 속도감 있고 긴박한 진행에 일조하는 감이 없잖아 있네요.
단, 각 경찰의 특수능력이 나름 개성적이라 이를 잘 활용하려면 경찰의 행동반경이 제한되어요. 배를 탈 수 있는 경찰이 시내 한가운데 있으면 특수능력이 무용지물이 되는지라 이런 부분은 단점이라고 느끼기도 했네요.

뭐가 어쨌건 그래도 여전히 잭이 조금 더 머리위에서 뛰어노는 기분이라 이정도 어드밴티지는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게임의 느낌이냐, 그건 또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화이트채플의 규칙을 가져와서 조금 어레인지한 수준의 게임으로, 전반적인 이미지는 "조금 색다른 화이트채플" 정도랄까요?
물론 화이트채플을 하느니 화이트홀을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화이트채플이 있음에도 굳이 돈을 들여가며 바꿀 필요가 있냐는 질문엔 그다지 긍정적인 대답을 드릴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화이트채플 자체에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여기서도 딱히 이렇다할 재미를 느끼긴 힘드실거에요. 그도 그럴것이 거의 룰이 비슷해서...
어디까지나 "화이트 채플은 꽤 재미있지만 플레이타임이나 중간중간 늘어지는거 때문에 자주 못돌린다." 는 분들께 추천한다는 정도입니다.

- 여담입니다만 범인을 맡은 플레이어가 (고의든 아니든) 경찰의 질문에 잘못된 답변을 할 경우 게임이 묘해진다는 단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3. 마치며
사실 이리저리 물고 뜯고 하긴 했지만 화이트채플 자체도 딱히 라이벌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든 게임입니다. BGG 랭킹에도 200위 안에 안정적으로 위치해있기도 하고요.
그 후속작으로 나온 화이트홀 역시 좋은 게임에서 파생된 게임이라 당연하게도 더 나쁘게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게임입니다. (나쁜말로 하면 나빠질정도로 바뀌지도 않았어요 속닥속닥)
스산하게 비가 오는 밤, 핀조명 하나 켜놓고 두 명이 진검승부를 펼치기에 딱 좋은 게임. 화이트홀 미스터리였습니다 :)

▲왔습니다. 경찰이 신날 수 있는 시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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